지난 4일 오전 7시 30분쯤(현지 시각), 프랑스 북부도시 칼레에 머물던 수단 출신의 압둘 라만 하룬(40)은 영국행을 결심하고 '정글'이라고 불리는 난민촌을 출발했다.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 땅인 칼레의 난민들은 보통 영국으로 가기 위해 트럭에 몰래 타거나, 방호벽을 넘어 정박 중인 페리선(여객과 자동차를 함께 싣는 선박)이나 차량 전용 셔틀 열차에 몸을 숨긴다. 이런 난민이 칼레에만 5000여명 있다. 하지만 하룬은 도버 해협(프랑스명 칼레 해협)을 가로지르는 해저 터널(유로터널)의 입구로 곧장 향했다.
최근 칼레 난민의 잇따른 난동으로 해저 터널 주변 터미널엔 새로운 방호벽이 설치되고 경비 인력도 추가 배치된 상태였다. 하지만 하룬은 4개의 방호벽과 삼엄한 경비를 뚫고 터미널에 진입했다. 400개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지만, 하룬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
길이 약 50㎞의 해저 터널은 고속열차인 유로스타와 차량을 실어 나르는 '셔틀 열차'가 다니는 2개의 주(主) 터널과 보수 차량 등이 다니는 '서비스 터널'로 구성돼 있다. 하룬은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열차가 다니는 남쪽 터널의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하룬이 어두운 터널을 걷는 동안, 열차가 시속 160㎞의 속도로 지나갔다. 그는 열차와 터널 사이 1m도 되지 않는 비상 공간에서 터널 내벽에 부착된 손잡이를 붙잡고 버티며 열차를 피했다. 그렇게 약 25㎞를 걸었을 때, 이상 움직임을 감지한 비상 알람이 자동으로 울렸다. 유로터널 운영사는 열차 운행을 멈추고, 하룬을 찾기 위해 비상 조명을 설치한 임시 열차를 보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하룬을 찾는 데 실패했다.
하룬이 발견된 곳은 터널이 끝나기 전 약 1㎞쯤 되는 지점이었다. 난민촌을 나선 지 약 10시간이 지난 시각이었다. 유로터널 측 대변인은 "하룬은 해저 터널을 걸어서 건넌 첫 번째 난민"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도 하룬처럼 해저 터널 도보 횡단을 시도한 난민이 있었지만,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목숨을 건 하룬의 탈출 소식이 전해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영국의 저명 언론인 프랜시스 라이언은 "짐바브웨에서 죽은 사자만큼도 난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난민 대책을 비판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던 한 아프리카 난민의 필사의 탈출이었다"며 관련 소식을 전했다.
영국 정부는 하룬이 실정법을 어긴 만큼 법정에 세우겠다는 방침이다. 그는 오는 23일 첫 재판을 받을 전망이다. 영국 정부는 "하룬의 사례를 보면, 프랑스 정부가 얼마나 난민 관리를 허술하게 하는지 알 수 있다"며 프랑스를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