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공, 더 느린 공, 가장 느린 공. 혹은 느림의 미학. KBO 리그 다승 선두 두산 베어스 좌완 유희관(29)은 확실히 별종이다. 이제 KBO 리그에도 150km를 쉽게 넘기는 투수들이 적지 않지만, 유희관은 그보다 20km는 더 느린 공으로 타자들을 농락한다.
흔히 투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제구라고 말한다. 그 다음이 공의 움직임, 수싸움 등이며 구속은 제일 마지막이다. 그렇다고 해도 130km를 간신히 넘는 유희관의 직구를 치지 못하는 타자들은 신기하게 보일 뿐이다. 빠른 공에 너무 익숙해져 오히려 유희관의 느린 공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지난 4일 유희관은 울산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8이닝 9탈삼진 무실점으로 롯데 타선을 틀어막았다. 올해 유희관과 두 번 만나 모두 당했던 롯데, 이종운 감독은 "일단 제구력이 되는데다가 타자 타이밍을 잘 빼앗는다"고 말한다. '배팅인 타이밍이고 피칭은 타이밍을 빼앗는 것'이라는 워렌 스판의 명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강민호 역시 "유희관은 몸쪽 공을 정말 잘 던진다. 결정적인 순간 몸쪽으로 들어오는데, 느린 공을 계속 보다보니 순간적으로 빠르게 느껴진다. 볼 끝도 정말 좋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당일 유희관과 맞대결을 펼친 롯데 우완 조시 린드블럼은 어떻게 생각할까. '유희관은 KBO 리그에서도 독특한 유형의 투수'라는 말에 린드블럼은 "메이저리그에서는 제이미 모이어라는 투수가 있었다"고 답했다.
모이어는 메이저리그 통산 269승 209패 평균자책점 4.25를 기록한 투수다. 무엇보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수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유명한데, 2012년 만 50세로 승리투수가 되기도 했다. 모이어의 속구 평균구속도 80마일(약 128km) 수준, 그렇지만 날카로운 제구력과 타자와의 수싸움, 그리고 결정구 체인지업을 앞세워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느린 공으로 활약을 펼치는 투수는 적지 않다. 메이저리그 최저구속 투수인 R.A. 디키(토론토)는 너클볼러니 논외로 한다고 쳐도, 1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이어가고 있는 마크 벌리(토론토)의 패스트볼 평균구속은 올해 84.2마일(약 135km)에 지나지 않는다.
린드블럼은 구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 투수가 어떻게 타자를 지배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흔히 투수는 빠른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선수가 자신의 방식대로 경기를 지배하는지가 중요하다. 유희관은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잡는데, 사실 구속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강속구 투수 린드블럼이지만 유희관의 장점을 인정한 것이다. 린드블러은 이어 "메이저리그에도 80마일로 잘 던지는 투수는 얼마든지 있다. 유희관은 공의 움직임과 제구력이 좋고, 특히 체인지업이 위력적이라 경기를 지배할 능력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유희관도 빅리그에서 통할 수 있을까. 린드블럼은 "사실 메이저리그 가봐야 아는 것"이라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개인적으로 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cleanupp@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