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청년 자전거 대장정 대원들, 이틀만에 우룽현 도착

4일 오전부터 이 곳은 지열(地熱)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중국 4대 화로(火爐)였다. 도로 표시판에 적힌 ‘오늘의 날씨’는 36도, 체감온도는 40도를 웃돌았다. 이날 치장에서 난촨(南川)까지 115km의 여정에 나선 대원들은 폭염과 싸우며 비포장 언덕길 30여 곳을 오르내렸다. 50km쯤 지나 열사병 증상을 호소하는 대원이 나올 정도였다. 강물에 뛰어들어 더위를 식힌 대원들이 손을 맞잡고 “만세”를 외쳤다. 강에서 멱을 감던 중국인들도 덩달아 환호성을 질렀다. 대원 우모시(25)씨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씻어내며 “정말로 산 넘고 물 건넌 광복 열사가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대장정 대원들이 4일 중국 치장 임시정부 청사터가 올려다보이는 치장허(綦江河)에 뛰어들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이곳은 1939~40년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원들이 남녀 합동 수상 훈련을 했던 장소로, 지금도 지역 주민들이 수영과 물놀이를 한다.

대원들이 뛰어든 치장허는 1939년 창설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광복군의 전신) 대원들이 남녀 합동 수상(水上) 훈련을 한 곳이다. 독립기념관 조범래 학예연구관은 “당시 남녀 대원이 합동 군사 훈련을 받는 장면을 구경하러 현지 주민들이 몰려들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고 말했다. 조국 독립의 길에 남녀가 따로 없었다. 청년공작대 창설 당시 대원 34명 중 11명이 여성이었다. 나이는 10~30대로 다양했는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딸 지복영,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의 딸 조계림 등 대개 임시정부 요인의 가족이었다.

대원들은 남녀가 똑같이 한국 역사를 배우고,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내무반 생활까지 했다. 한국광복군 때 제3지대장을 지낸 김학규의 부인 고(故) 오광심 여사는 “여성들은 통신·정보수집·모금활동 뿐 아니라 세탁·재봉·취사를 담당하기도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 곳에서 대원들은 남녀가 아닌 항일 운동의 동지(同志)였다.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등을 지낸 고(故) 지복영 여사는 “월급(중국돈 5위안)도 남자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3일 충칭을 출발한 대장정팀은 힘겨운 라이딩 끝에 치장을 거쳐 5일 우룽(武隆)현에 입성했다. 4일 오전부터 충칭~우룽현 일대는 찜통 더위로 끓어올랐다. ‘중국의 4대 화로(火爐)’라고 불릴 만 했다. 체감온도는 40도를 웃돌았다. 특히 치장에서 난촨(南川)까지 88km 길엔 언덕이 30곳 이상 나타났다. 50km쯤 지나자 열사병 증상을 호소하는 대원도 나왔다.

충칭과 치장 시민들은 단복을 입은 대원 20명이 일렬로 국도를 달릴 때마다 집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원정대를 뒤따라 오며 “파이팅”을 외치는 자전거 족(族)도 있었다. 난촨에서 우룽현으로 이동하는 81km 구간에선 충칭시 정부에서 특수 경찰차량 4대와 공안 15명을 파견했다.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정대를 앞뒤에서 호위하는 장관이 연출됐다. 원정대원들이 “고맙다”고 인사하자, 공안 관계자는 “먼 곳에서 귀한 손님이 왔는데 당연한 도리 아니냐”고 화답했다.

치장 臨政청사 자리엔 아파트가... '李東寧 舊居遺址' 표지판 훼손 심해

치장(綦江)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중국 충칭(重慶)을 출발한 ‘한·중 청년 자전거 대장정’ 팀이 치장에 도착한 다음날인 지난 4일, 옛 임정 청사가 있었던 치장허(綦江河) 강변 퉈완(沱灣) 8호와 김구 주석이 거주하던 그 옆 퉈완 9호 자리에는 10년 전 지어졌다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임정 청사 자리(8호) 1층에는 화장실 인테리어 전문점이, 김구 주석 거주지(9호) 1층에는 카센터가 자리잡았다.

건물 아래 강변으로 내려가 보니 아파트 옆 반쯤 남은 초라한 시멘트 건물 한쪽 벽에 ‘韓國臨時政府(한국임시정부) 主席(주석) 李東寧(이동녕) 구거(舊居) 유지(遺址)’란 표지판이 붙어 있어, 임정 4대 주석을 지낸 이동녕 선생이 거주하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김구 주석이 “재덕이 출중한데도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앞에 내세웠다”고 칭송했던 이동녕 선생은 1940년 3월 치장 임정 청사에서 향년 71세로 서거했다. 치장 문화체육위원회와 문물관리소가 2000년에 설치한 이 표지판은 훼손이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관리되지 않고 있었지만, 그나마 주변 다른 임정 관련 유적들과는 달리 살아남은 셈이었다.

임정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광복군 창설에 큰 역할을 한 조성환 선생 거주지로 추정되는 인근의 벽돌집은 무너진 채로 방치돼 있었고, 지붕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상성가(上升街) 일대 임정 요인과 가족이 거주하던 곳은 동네 자체가 재개발 구역이 돼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단지 고층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공사 차량이 분주히 오갔다.

1939년 4월부터 1940년 10월까지 임정이 치장에 있었던 기간은, 오랜 이동기를 끝내고 충칭에 자리잡기 직전에 전열을 재정비한 곳이라는 의미가 크다. 광복군 창설의 기반 작업이 이뤄진 곳이 바로 치장이었다.

치장의 중산로(中山路) 18호는 옛 잉산빈관(瀛山賓館)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중산로소학(中山路小學) 학교 건물이 들어서 역시 옛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1939년 8월 27일 독립운동사의 중요 대목 중 하나인 ‘7당통일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오랫동안 중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충칭 진입을 앞두고 ‘좌·우 통합’을 시도한 회의였다. 김구·김원봉 두 독립운동가가 1939년 5월 발표한 공동선언 ‘동지들에게 보내는 서신’은 “주의와 사상이 같지 아니할지라도 동일한 적 앞에서 동일한 정치강령하에서는 한 조직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회의가 뜻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통일의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대립해 7당통합은 결렬됐지만,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3당 통합만큼은 성사됐다. 이 때의 좌·우 통합 노력은 1942년 충칭에서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다.

당시 7당통일회의를 주의깊게 지켜본 중국 국민당 정부 요원은 통합 실패의 이유에 대해 “한국인들은 각자 개성과 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오늘의 우리는 그 분석에서 과연 얼마나 멀어져 있는 것일까.

[[韓·中 청년 자전거 대장정] 대장정 첫 기착지는 임시政府 마지막 사진 찍던 돌계단]

[치장 臨政청사 자리엔 아파트가… '李東寧 旧居遺址' 표지판 훼손 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