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지방엔 37도를 웃도는 폭염이 한창이다. 한여름엔 태양의 눈을 피하고 싶어서, 스타라면 대중의 눈을 피하고 싶어서, 때로는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는 고독한 이 도시에서 ‘날 좀 봐주세요’라는 호소를 담은 채, 여름의 도시인은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처럼 선글라스를 쓴다.
◆선글라스 뒤로 눈빛을 감추면 누구나 대담해진다
선글라스는 짙은 선팅을 한 밴의 유리창 같다.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마치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시선의 전능성. 선글라스의 원조 격으로 알려진 15세기 중국의 연수정 색안경은 주로 재판관들이 죄인을 심문할 때 착용했다. 말하자면 좀 더 우월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전쟁 영웅 맥아더나 박정희 전 대통령, 카다피 등 권력자의 선글라스 역할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선글라스는 권력자의 시선을 은폐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검열하게 만든다. 이 시대 가장 스타일리시한 무표정을 갖고 있는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를 보라. 어두운 패션쇼장 안에서도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글라스는 나의 방어막 같은 것이다. 패션쇼가 지겨워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고, 반대로 즐기고 있다 해도 모를 것이다.” 참고로 그녀의 반응이 패션 산업과 독립 디자이너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와 ‘만추’의 탕웨이는 둘 다 오랜 수감 생활 뒤에 출옥하지만, 그 애티튜드는 극과 극이다. 탕웨이는 낯선 세계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트렌치코트에 쓸쓸하게 몸을 묻지만, 이영애는 추운 겨울에 얇은 원피스를 입고도 당당하다. 선글라스라는 면죄부 덕이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썼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시선을 우리가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심지어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환영 인파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냉소를 날린다. 가수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부르며 말춤을 출 때 쓰는 선글라스도 ‘금자 씨’의 그것처럼 반권위의 발랄함을 발산하지 않았던가. 선글라스 뒤에서라면 무슨 일이든 부끄러움 없이 저지를 수 있을 것 같다.
◆선글라스는 남과 구별된 듯한 쾌감을 준다
보통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애용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폼나 보이기 때문이다. 스타의 선글라스는 사라지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젊은 시절 ‘탑건’의 조종사 톰 크루즈가 썼던 미국적인 레이밴부터, ‘애비에이터’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썼던 클래식한 항공용 선글라스, 퍼스트 레이디 시절 파파라치 카메라가 탐스럽게 포획하던 재클린 케네디의 현대적이고 대담한 선글라스까지.
확실히 선글라스를 끼면 왠지 우쭐해지고 남과 구별되는 듯한 독특한 쾌감이 있다. 특히나 얼굴의 반을 가리는 빅선글라스는 작은 눈이나 낮은 코를 커버할 수 있어, 가면무도회 가면처럼 착시용으로 꽤 유용하다. 그래서 선글라스만 끼면 사람들은 ‘연예인 코스프레 한다’고 흘끔거린다.
선글라스가 아이콘인 배우 잭 니콜슨은 “선글라스를 끼면 난 잭 니콜슨이지만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나는 그저 뚱뚱한 60대 아저씨다”라고 말했다. 여배우 이미숙도 비슷한 말을 했다. “여배우라는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 집에서 혼자 청소기 돌릴 때도 선글라스를 낀다”고.
선글라스 효과에 중독되면 비 오는 날이나 한밤중 카페에서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어두운 극장 화면에서 발광하는 여배우처럼, 평범한 행인들이 몰래 나만 훔쳐보는 것 같은(실은 이상하다고 구경하는) 야릇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무리와 풍경에서 유체 이탈되는 듯한 격리 감과 함께, 조도가 낮아진 세상에 한결 무심해지기까지 한다.
◆영화감독들은 선글라스를 사랑한다
누아르 필름이야말로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바라본 삶의 어두운 표정에 관한 영화다. 빛이 차단된 암흑, 폐쇄된 공간, 붉은 피와 예정된 파멸, 그리고 그 안엔 예정된 의리와 배신이라는 마초적 ‘소스’. 그 ‘검은 소스의 맛’을 보여준 최초의 홍콩 영화 이나 에서 선글라스를 쓴 주윤발을 어찌 잊을까.
누아르 영화 ‘달콤한 인생’을 만든 김지운 감독이나 ‘중경삼림’을 만든 왕가위 감독도 눈빛을 감추기 위해 밤이나 낮이나(촬영장은 물론 인터뷰 현장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글라스를 썼다. 그들에겐 인생이 곧 극장이다. 그들에게 선글라스의 프레임은 극장의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에 다름 아니다.
90년대 명작으로 칭송받는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에는 아주 밝은 선글라스와 어두운 선글라스가 다 나온다. 날씨에 상관없이 이율배반적으로 레인코트와 선글라스로 자신을 은폐한 채 지하 도시를 떠돌던 임청하는 그 영화를 마지막으로 대중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반대로 ‘캘리아포니아 드리밍’을 흥얼거리던 왕정문은 몇 년 후, 스튜어디스 복장에 콧잔등에 살짝 얹혀진 귀엽고 동그란 선글라스를 끼고 금의환향한다.
◆나이 든 사람일수록 선글라스를 써야 한다
그런데 이런 선글라스는 젊은이들보다 나이 든 사람이 썼을 때, 훨씬 파격적이다. 희끗희끗한 은발과 대비되는 검은 선글라스는 맹수의 확장된 동공 같은 역할을 한다. 70년대 이만희 감독의 영화 ‘삼포 가는 길’로 유명한 여배우 문숙이 은발을 휘날리며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그렇다. 존 레논의 연인이자 개념 미술가인 오노 요코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를 낀 모습은 전위적이기까지 하다.
“나이 들면 제일 먼저 눈부터 안 보인다. 어쩔 수 없이 돋보기를 끼는데, 그럴 땐 실제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선글라스는 그 반대다. 나이와 상관없이 내 몸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고 선글라스를 즐겨 쓰는 육순의 심리학자인 김선희 씨는 말한다.
흰머리는 노화의 증거지만, 흰머리가 검은 선글라스와 화학 작용을 일으키면, 그 아름다움의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 된다. 아이웨어 전문 브랜드 사피로의 한현선 부장은 “나이들수록 눈의 각막이 약해져서 눈물이 나고 눈이 시린 증상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햇빛 비치는 날 뿐 아니라 바람 부는 날에도 일상적으로 선글라스를 착용해 안구를 보호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남자들에게 선글라스의 패션 파워는 대단하다
특히 선글라스는 남자들이 끼면 그 매력이 배가된다. 스타일리스트 김성일 실장은 “여자들이 쓰는 선글라스는 화려한 메이크업 개념이지만, 남자들이 쓰는 선글라스는 심리적으로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증가시키고 남성의 우월감을 더욱 부추긴다”고 설명한다. 권력자들이나 조폭들이 선글라스를 애용하는 이유다. 군인이나 레이서, 파일럿 등 야생 본능이나 추월 본능이 강한 남자들에게도 선글라스는 필수 액세서리다.
“남자가 구멍 뚫린 면티셔츠를 입었더라도 클래식한 선글라스 하나만 끼면 왠지 그 모든 것이 수수한 설정으로 보이면서, 멋있게 늙어간다는 느낌을 줍니다”라고 김성일 실장은 첨언한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안경 위에 덧 씌우는 클립 온 선글라스를 추천한다.
올 여름 트렌드인 복고풍 선글라스 대표 아이템은 애비에이터(Aviator), 캣 아이(Cat-Eye), 오버사이즈(Oversize)다. 렌즈 표면을 코팅해 사물을 거울처럼 비추는 미러 렌즈를 장착한 애비에이터 선글라스도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남자들에겐 레이밴과 보잉, 견고한 형태감의 클래식한 뿔테 선글라스가 제격이다.
◆스타일리스트 김성일이 추천하는 남성 선글라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