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가는 길'6.25 전쟁 시 피난민들이 살림살이를 챙겨 행렬하고 있다. 전쟁통에 모든 것이 파괴되어 피난민들은 판자집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이들이 제일 처음으로 배우는 영어가 Give me a chocolate이었을 정도로 먹을 것이 없었고(아이들이 지나가는 미군에게 Give me a chocolate하면, 미군들이 귀여워서 초콜릿을 주었다고 한다), 의정부에서는 미군들이 먹다 버린 닭뼈를 이용하여 꿀꿀이죽을 끓여먹기도 했다. 1950년 7월 29일
'그 때 그 사건'혁명재판소의 5개 법정에서는 일제히 첫 공판을 개정하고 부정선거에 관련된 최인규를 비롯하여 전 국무위원, 기획위원(전 자유당) 민족일보사건 등 7대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한 심리가 진행되었다. 사진은 심리를 받는 민족일보사건 피고인들. 1961년 7월 29일
'경례'혁명재판소의 5개 법정에서는 일제히 첫 공판을 개정하고 부정선거에 관련된 최인규를 비롯하여 전 국무위원, 기획위원 (전 자유당) 민족일보사건 등 7대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한 심리가 진행되었다. 부정선거 관계 피고들이 퇴정하는 가운데 전 자유당 국무위원에게 경례를하는 방청인의 모습. 1961년7월29일
'전쟁의 얼룩'유엔군관할구역내 비무장 지대 남쪽에 침입한 북한괴뢰군들이 미군병사 두명을 죽이고 한명에게 부상을입혔다. 지프차가 넘어져있는곳 주변에 핏자국이 얼룩졌다. 1963년 7월 29일 새벽 5시 30분경 유엔군 관할구역 북한군 기습사건현장.
'철수하겠습니다' 4월 19일을 전후하여 학생시위는 재발되었고,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오후 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 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정시켰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 ·출판 ·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 ·수색 ·체포 ·구금,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金鍾泌)이 사임하였다. 6.3계엄후 7월29일 철수할 계엄군. 1964년 서울대학교 교문.
6.3계엄후 7월29일 철수하는 계엄군. 1964년 시청 앞에서
'기억하시나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일대 전경 1973년 7월29일
'달리자' 성남 새마을 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의원 세미나에 참석중인 김영삼대표가 당원들과 새벽에 조깅을 하고 있다. 1992년 7월 29일
'자유민주연합' 예산보선 패배 후 열린 자민련간담회에서 김종필총재가 한영수(우),박철언부총재등과 향후대책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1997년7월29일

사진/조선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