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대형마트 캠핑용품 코너에 파라솔과 코펠, 접이식 의자 등이 진열돼 있었다. 캠핑장에서 불을 쉽게 피우기 위해 사용하는 번개탄은 이 진열대 첫째 칸에 놓였다. 가격은 4장에 3900원. 이날 마트에선 2~3명이 자유롭게 번개탄을 고르고 구매했다. 마트 관계자는 "부탄가스는 미성년자에게 판매하는 걸 제한하고 있지만 번개탄은 남녀노소 누구든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다"며 "자살 예방 교육을 받거나 손님에게 번개탄 사용 목적을 물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마트뿐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번개탄은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요즘 같은 휴가철엔 '캠핑용품'으로 묶여 가격은 개당 300원까지 떨어졌고 당일 배송도 가능하다.
해외에서도 번개탄을 이렇게 쉽게 구매할 수 있을까. 대만 신베이(新北)시 마트 진열대에선 번개탄을 찾기 어렵다. 번개탄은 대부분 자물쇠가 잠긴 보관함에 있거나 점원이 있는 진열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번개탄을 사기 위해서는 점원에게 직접 번개탄을 달라고 얘기하고 사용 목적을 말해야 한다. 타이난(臺南)시에선 2010년부터 번개탄을 판매하는 점원에게 번개탄과 도수가 높은 술을 동시에 사거나 구매자가 우울증 증세 등을 보이는 것 같으면 핫라인을 통해 자살예방센터로 연락하도록 '자살 예방 교육'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이 도시에선 2006년 127명이던 번개탄 자살자가 2012년 71명으로 줄었다. 인근 일본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가게가 번개탄 구입 시 사용 목적과 사용 장소를 확인한다. 홍콩은 번개탄을 이용한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실외에서 취사할 때 번개탄 대신 전기 그릴을 사용하도록 권고한다.
번개탄을 이용한 자살 사망자가 해마다 늘어나면서 국내에도 번개탄 구매 제한 매뉴얼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번개탄을 사용한 자살 사망자는 2004년 50명에서 2005년 62명, 2006년 64명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2013년엔 1825명으로 10년 새 30배 이상 늘었다. 지난 18일 국정원 직원 임모(45)씨도 마트에서 아무런 제재 없이 번개탄을 구입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손창환 서울아산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국내에선 연탄보일러 사용 지역과 관계없이 대형마트나 편의점 등 어디서든 번개탄을 구할 수 있다"며 "이런 점이 번개탄을 이용한 자살을 더 쉽게 만드는 한 이유"라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제재나 규정은 전무한 실정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원진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번개탄 사용 자살이 급격하게 늘고 있는 만큼 이미 비슷한 사회 문제를 겪은 홍콩과 대만의 규제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며 "아직 국내 연탄 수요가 있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접근을 제한하는 건 어렵지만 자살을 막기 위해 부분적으로라도 규제하는 걸 심각하게 논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택수 한국자살예방센터 센터장도 "위험성 물질인 번개탄을 경고 문구 삽입이나 나이 제한 같은 규정 없이 온라인에서까지 누구나 살 수 있게 한 건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번개탄을 제조하는 업체들도 영세하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영세한 서민이다 보니 일괄 규제를 하는 것은 어렵다"며 "대신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신형 번개탄을 2017년 상용화 목표로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