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경 법조전문기자·변호사

마을버스 운전기사 한모(67)씨는 지난해 9월, 서울 관악구의 한 고등학교 앞 버스정류장을 약 10m 못 미친 지점에서 뒷문을 열어 승객 김모(여·37)씨를 하차시켰다. 그런데 오토바이가 달려오면서 김씨를 치었고 김씨는 버스 앞쪽까지 밀려와 전치 5주의 발가락 골절을 입었다. 한씨는 자신과 무관한 사고이며 오토바이 운전자가 사고 처리를 할 것이라고 믿고 버스를 계속 운행했다. 그러나 오토바이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도망갔고 한씨만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도주차량), 즉 '뺑소니범'으로 기소됐다.

한씨는 검찰에서 벌금 300만원의 약식 명령을 받았지만 억울한 마음에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당시 차가 너무 밀려서 버스정류장에 조금 못 미쳐 정차했고 오토바이가 오지 않는 것도 확인했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 형사21단독 김민정 판사는 블랙박스 영상을 봤을 때 한씨의 주장이 의심스럽다고 판단했다. 오토바이 크기나 위치로 봤을 때 사이드미러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토바이 운전자뿐 아니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뒷문을 열어 준 한씨의 책임도 있다고 봤다.

나아가 한씨에게는 뺑소니의 책임도 인정됐다. 과실로 사고가 난 이상 구호 조치 의무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씨는 "출발하면서 사이드미러로 보니 피해자와 오토바이 운전자가 서로 얘기한 후 운전자가 골목으로 들어가고, 피해자는 앉아서 기다렸다"며 "일부러 차를 세워 피해자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 판사는 앞문까지 밀려올 정도의 충돌 강도였다면 한씨가 당연히 차를 세우고 피해자를 살피고 오토바이 운전자의 연락처도 받아야 했다고 밝혔다.

김 판사는 한씨의 벌금을 300만원으로 정했다. 뺑소니는 징역 1년 이상 또는 500만~3000만원의 벌금으로 형(刑)이 제법 무겁다. 하지만 사고 경위를 고려해 검찰이 벌금 300만원에 약식 명령을 청구했고 김 판사는 이를 그대로 선고했다.

흔히 뺑소니 하면 차로 사람을 치고 그대로 달아나는 경우를 생각하지만 한씨처럼 직접 사람을 치지 않은 상태에서도 성립할 수 있다. 법률적으로 뺑소니의 개념은 '과실로 인명 사고를 내고 구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도주한 경우'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한씨처럼 '구호 조치'를 하지 않은 경우다. 요건이 생각보다 까다롭다. 부상이 가벼워 보이더라도 일단 차에서 내려 상태를 살펴야 한다. 사고 현장에서 명함을 줬더라도 책임을 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대법원은 사고 운전자가 피해자에게 명함을 주고 인근 택시기사에게 병원 후송을 부탁한 사건에서도 유죄를 인정했다. 사고 수습 전에 현장을 벗어난 것이 문제였다.

구호 조치를 취했더라도 신원을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 역시 뺑소니다. 피해자를 병원에 후송하면서 간호사에게 목격자 행세를 하고 진료 차트에 자기 이름을 적고 병원 측의 응급조치를 돕다가 말 없이 사라진 경우에도 유죄로 인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