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찬·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어지간한 문학의 문외한도 암송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대관절 어떻게 해야 사뿐히 밟으면서 동시에 즈려밟을 수 있다는 겐지, 명색이 시(詩) 전공자인 필자도 알지 못했다. 학창 시절, '즈려밟다'란 '짓밟다'라는 뜻으로 배웠거니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사뿐히 짓밟는 그 모순된 동작은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남섬의 뉴브라이튼 비치. 멋진 해변의 한복판, 바다 쪽으로 통유리창을 낸 전망 좋은 건물이 있었다. 놀랍게도 도서관이었다. 놀라움은 더 이어졌다. 주차장을 향해 가는 보도 블록 하나하나에 사람들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기부자들이리라. 그 고마움과 겸손함이라니, 이방인 처지에 차마 밟기가 미안했다. 그래서 정말 살짝, 아주 사뿐히 밟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다음 블록도 사뿐히 밟으려다 보니, 아니 사뿐히 밟으려 하면 할수록, 앞서 디딘 발에 힘이 들어가는 게 아닌가. 사뿐히 밟았던 그 블록을 짓밟지 않고는 한발도 나아갈 수 없었던 것. 그때 깨달았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꽃들을 사뿐히 밟으려면 그 꽃들 하나하나 눌러서 내리밟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니, 떠나가는 이를 위해 진달래 꽃길 깔아놓고 단 한 가지 바란 것은, 내닫지도 말고, 대충대충 가지도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꼭꼭 가슴에 새기며 가달라는 것이렷다.

그런즉 '사뿐히 즈려밟기'는 자장면이냐 짬뽕이냐 같은 양자택일도 아니고, 둥근 삼각형 같은 모순도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한 명 한 명 편애하다 보니 전 학생을 골고루 사랑하게 되는 담임선생님 비슷하다. 그런 사랑의 끝에는 화합과 정의와 평화가 온다. 지난달 26일, 오바마 대통령은 찰스턴의 흑인교회 장례식장에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른 다음, 총기 난사 희생자 아홉 명을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했다. 진달래꽃 사뿐히 즈려밟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