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은 60년대 전후 복구와 급속한 산업화, 70~90년대 도시 확장 및 신시가지 개발, 2000년대 균형발전 등 시대적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 왔지만, 정작 사람이 소외되고 서울의 자산과 미래세대가 고려되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습니다. 지난 3월 발표한 서울시 도시재생 계획은 시대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반영하여 계획 되었다고 합니다.
지역 특성과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맞춤형 재생 사업은 4개 유형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최근 진행되고 있는 사업에 관한 내용을 모았습니다.
[엎고 부수는 재개발·재건축 가고 '도시 재생'이 온다]
[서울시, 27개 도시재생 선도지역 지정…2018년까지 1조3000억원 투입]
◎세종대로 일대 역사문화 특화공간 조성
총 길이 1.1km인 덕수궁 돌담길은 현재 전 구간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의 일부가 주한 영국 대사관 부지 내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서울시가 작년 10월부터 추진한 '덕수궁 돌담길 회복 프로젝트'를 주한 영국 대사관에 제안했고 해당 부지를 사들임으로써 131년 만에 덕수궁 돌담길이 완전히 연결됩니다.
내년이면 덕수궁 한 바퀴를 완전하게 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 덕수궁 돌담길 '출입금지 170m'… 131년만에 다 돌수있게 열린다]
이와 더불어 서울 세종대로의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이 오는 7월 말까지 철거되고, 이 자리에 잔디 광장이 조성됩니다. 이 광장에는 지하 공간도 조성돼 장기적으로 서울시청, 지하철 광화문역, 광화문광장까지 지하로 연결해 '지하 복합 시민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집니다.
서울시는 "장기적으로는 서울 세종대로 일대가 지하로 모두 연결되도록 하는 구상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 사업으로 일제에 의해 훼손된 덕수궁의 정기와 대한제국의 숨결을 회복하고 세종대로 일대 역사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일제 잔재' 국세청 별관 78년만에 철거…시민광장 들어서]
[[법안의 발견] 친일파 기념물 전국 37개 철거될까]
◎세운상가 일대 도심산업 재활성화
종로 세운상가 일대가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공중보행교 등을 복원하고 다양한 문화사업이 이뤄질 수 있도록 재탄생합니다.
세운상가는 1968년 세워진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축물인데요. 서울시는 종로구 세운상가와 이 일대를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복원시키는 '세운상가 활성화(재생) 종합계획' 을 발표했습니다. 청계천 복원 당시 철거한 세운상가 가동~청계상가 구간 공중보행교를 다시 만들고 기존 3층 높이 보행 데크는 보수·보강 작업이 이뤄집니다.
◎서울역 역세권 주변 재생
서울역고가는 2006년 정밀안전진단 안전성 평가에서 D등급을 받았습니다. 서울시는 서울역고가를 산업화 시대 유산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전면 철거를 하지 않는 대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생한다는 방침을 지난해 밝혔습니다.
서울시는 서울역고가 재생을 통해 보행환경 향상, 남대문 시장 활성화와 도시재생 촉진, 소통·교통·안정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남대문시장 상인과 인근 주민들은 이 계획에 반발하고 있어 계획 추진에 차질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서울역 고가도로 '사람길'로 재탄생…17개 보행로 연결]
[[르포] 서울역 고가 '뉴욕 하이라인파크'로 만든다? 주민들 "그냥 철거해라" 반발]
[호텔 훔쳐보기 장소 된 美 공원은 고가 철도 개조한 '뉴욕의 청계천']
◎코엑스~잠실운동장 일대 국제교류복합지구 조성
서울시는 한강과 탄천을 포함한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기반시설을 정비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를 위해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시설물 중 주경기장을 제외한 야구장, 다목적 체육관, 수영장 등을 인근에 새로 지을 계획입니다. 철거되는 잠실야구장 자리에는 전시·컨벤션 시설이 들어서게 됩니다.
고종(姑從)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 3인을 파견한다.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국권 회복을 도모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다. 이를 계기로 고종은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讓位)한다.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 체결로 조선의 519년 역사는 끝난다.
덕수궁에서 노년을 보내던 고종은 평소처럼 식혜를 먹은 후 돌연사한다. 향년 68세였다. 뇌출혈 또는 심장마비로 서거했다는 '자연사설'과 '자살설', 식혜에 독이 들었다는 '독살설' 등이 있지만 아직 고종의 사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에게 13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순종과 의친왕, 영친왕, 그리고 덕혜옹주를 제외하고는 어린 나이에 모두 죽었다.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남은 4명의 자녀들은 어떤 일생을 보냈을까?
. 본명 이척(李坧). 1874년 출생.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슬하에 태어나 유일하게 성년이 넘도록 생존한 적자(嫡子)이다. 그러나 그도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황제에 오른 후부터 나라를 뺏기기 전까지 3년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일제 통감(統監)의 내정간섭으로 통치자로서 무능했다.
"짐이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해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순종 3년 8월 22일 조령(詔令)이 내려졌다. 한일합병조약으로 순종은 황제에서 왕(李王·이왕)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1926년 심장마비로 서거하기 전까지 창덕궁에서 지냈다.
그에게 후손은 없었고, 이왕 직위는 이복동생 영친왕에게 물려줬다.
. 본명 이강(李堈). 1877년 출생. 후궁 귀인(貴人) 장씨의 소생이다. 18세 나이에 일본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임명된 이후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고, 미국에서 유학한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부터 풍부한 국제 무대 경험을 토대로 독립운동에 일생을 보낸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해 독립운동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돼 총독부 관사에 연금(軟禁)된다. 이것이 일명 '대동단(大同團) 사건'이다.
끝까지 배일(排日) 정신을 지킨 그는 1945년 해방 후 일반인으로 살다가 6·25 전쟁 피난길에서 영양실조에 걸려 1955년 서거한다.
이건(李鍵)·이우(李鍝)를 비롯해 13남 9녀가 태어났으며, 현재까지 고종의 후손으로 대(代)를 잇고 있다.
. 본명 이은(李垠). 1897년 출생. 태비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소생이다. 후손이 없던 순종이 이복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종묘에 모셔진 마지막 조선의 왕족이 된다.
1907년 황태자가 되자마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고,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거치면서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1920년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한 몸)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이방자(梨本宮方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와 정략결혼한다.
일본에 붙잡혀 있는 동안 일본 육군 중장에 오른 데다, 순종 서거 후 이왕 직위도 물려받아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어머니 임종도 보지 못했고, 늘 고국을 그리워했다.
해방 직후 재산 국유화, 직위 박탈 등 황족으로서 특권이 모두 폐지됐고, 이승만 정권의 반대로 귀국이 좌절된다. 일본에서도 왕족 명단에 제외돼 '재일한국인(在日韓國人)'이라는 무국적(無國籍) 상태로 어렵게 생활한다.
1963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해 귀국. 귀국 후 국가 보조금을 받아도 뇌질환 치료비 때문에 가난한 생활이 계속 됐고, 1970년 서거한다.
두 명의 아들 이진(李晉)과 이구(李玖)을 두었지만, 장남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
. 본명 이덕혜(李德惠). 1912년 출생. 후궁 복녕당 귀인 양씨의 소생이다.
고종이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이자 고명딸(아들 많은 집의 외딸)로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 그러나 자신을 지켜주던 아버지를 8세 나이에 잃고 1925년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학교를 다닌다.
1930년 몽유증과 조발성치매증(조현증)이 나타나 이복 오빠 영친왕 내외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치료를 받는다. 이듬해 병세가 호전돼 쓰시마섬(對馬島) 도주(島主)의 아들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한다. 결혼 1년 만에 딸 정혜(正惠·마사에)를 얻으며 원만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증세가 점점 심해지면서 1946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한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영친왕 내외가 합의 이혼을 결정한다. 딸도 유서를 남긴 채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된다.
영친왕 내외가 보살피던 덕혜옹주는 1962년 어렵게 귀국한다. 호적은 20년 후 생긴다.
어릴 적 자신을 돌보았던 유모를 다시 만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다가 1989년 서거한다. 이때까지도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덕혜옹주의 일생을 다룬 영화 '덕혜옹주'가 8월 3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궁에서 태어나 일제의 핍박을 받으며 오랜 세월을 보낸 비운의 순종, 의친왕, 영친왕, 그리고 덕혜옹주.
그들은 해방 후에도 무관심 속에서 말년을 마친, 조선의 마지막 왕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