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4시(현지 시각) 이탈리아 베네치아 본섬. 어두컴컴한 전시장에서 지휘자를 반원으로 둘러싼 성악가 7명이 악보를 넘겨가며 노래하고 읊조렸다. 불협화음을 넘나드는 선율이 20분간 관객을 매혹했다. 제56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 전시에 출품된 한국 작가 김아영(36)의 '보이스(voice) 퍼포먼스' 작품이다. 제목은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 기름을 드립니다. 쉘 3'. 작가가 대본을 쓰고 현대 음악 작곡가 김희라가 음악적으로 구현했다.

시각의 전시장에 '시간'이 들어왔다. 9일 개막, 11월 22일까지 열리는 올해 비엔날레 전시장은 배우들의 실연(實演)이 펼쳐지는 콘서트홀이고, 95분짜리 장편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극장이 됐다. 찰나의 예술인 퍼포먼스가 주를 이뤘고,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장편 영화가 부쩍 늘었다. 언제든 들르면 감상할 수 있는 '시각 예술'에서, 정해진 시간에 가야 볼 수 있는 '시간 예술'로 확장되는 것이다. 공식 개막을 앞두고 나흘간 열리고 있는 프리뷰 현장을 찾았다.

퍼포먼스와 장편 영화가 대세

국가별 전시관이 밀집한 자르디니 공원에서도 대세는 퍼포먼스. 이탈리아관 '아레나'에서는 배우들이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또박또박 낭독했다. 영국의 영상 작가인 아이작 줄리언의 실험적인 퍼포먼스다. 하루 네 번씩, 7개월 동안 배우들의 자본론 낭독을 들을 수 있다.

6일(현지 시각)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탈리아관 앞 야외 전시장에 중국 작가 쉬빙의 작품 ‘불사조’가 전시됐다. 폐자재를 활용해 만든 작품. 주최국 국가관 앞 상징적인 공간에 중국 대표 작가의 작품이 설치됐다.

김아영 작품은 중동에 근로자로 파견됐던 아버지의 경험이 토대가 됐다. 그는 "2차 석유파동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석유 자본과 이를 둘러싼 국제 외교 등을 고찰했다"며 "이전엔 주로 영상 작업을 하다가 사운드만으로 어떻게 내러티브를 만들 수 있을까를 더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올해 한국관 커미셔너인 이숙경씨는 "퍼포먼스는 시작과 끝이 분명한 '시간에 바탕을 둔 미디어'다. 과거엔 시각예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던 장르였지만 이제는 퍼포먼스가 미술관 소장품까지 되는 추세"라고 했다.

영화가 전시장에 들어온 것도 눈에 띄는 현상이다. 특히 장편 영화가 많아졌다. 임흥순(46)은 95분짜리 영화 '위로공단'을 선보였다. 캄보디아·베트남 이주노동자를 비롯해 구로공단, 마트와 콜센터 등에서 일하는 여성 65명을 2년간 취재해 여성 노동자의 삶을 풀어낸 다큐멘터리다.

이탈리아 조각가 피노 파스칼리의 ‘대포’(1965).

독일관에서는 '공장'을 주제로 대형 전시를 꾸민 후 지하 공간에 아예 영화관을 재현했다. 첨단 게임을 연상시키는 68분짜리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관람객들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화면을 올려다봤다. 현장에선 "이러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베네치아 영화제가 합쳐지는 것 아니냐"는 농담까지 나왔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

나이지리아 출신 오쿠이 엔위저가 총감독을 맡은 올해의 주제는 '모든 세계의 미래(All the World's Futures)'. 89개 국가관 전시와 53개국 136명 작가가 참여한 본전시가 펼쳐졌다. 오쿠이 엔위저는 "사회의 급진적 변화, 세상의 다양성과 불확실성, 세상을 둘러싼 역학구조에 대해 예술가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정치적인 미술을 통해서 인류의 미래를 가늠해보자는 취지다. 폭력과 전쟁, 노동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았다.

한국 작가들의 약진

한국 작가들의 전시가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올해 본 전시에는 김아영, 임흥순, 남화연 등 한국 작가 3명이 초청됐다. 한국 작가가 초청받은 건 6년 만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재단이 승인한 병행 전시로 단색화전을 비롯해 상하이 히말라야 뮤지엄 주최의 이매리 작가 전시, 독립 큐레이터 김승민이 기획한 전시가 마련됐다. 이이남·한호·남홍·박병춘·전광영 등도 그룹전이나 초대전 형태로 전시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