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17분. 수학여행에 나선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생 325명 등 476명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병풍도 북방 1.8해리 '맹골수도(孟骨水道)'에서 전복돼 침몰했다. 이 사고로 단원고 학생 246명을 포함해 모두 30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초대형 여객선이 맥없이 뒤집혀 가라앉는 장면을 TV 생중계로 지켜본 국민은 안타까움과 함께 "어떻게 저렇게 큰 배가 허망하게 가라앉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빠졌다.
대한민국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지난 1년을 보냈다. 그리고 국회·감사원·검찰의 조사와 법원 재판을 통해 "세월호는 언젠가 침몰할 수밖에 없었던 인재(人災)"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선박 증축과 운항 관리, 화물 적재, 승무원 안전 교육까지 어느 것 하나 규정대로 지켜진 것이 없었다. 승객의 안전보다 이익에 눈이 먼 선사(船社)와 직업윤리를 상실한 선원, 무능과 안일이 체질화한 감독 당국이 합작한, '복원력을 상실한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선사·선원·당국이 합작한 참사
세월호 사고 후 지난 1년간 침몰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는 검찰의 수사와 국회 국정조사, 감사원 감사 등 크게 세 갈래로 진행됐다. 앞으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의 활동이 남아 있지만, 그간의 조사를 통해 세월호 침몰의 기술적 원인은 어느 정도 밝혀졌다. 선사의 무리한 증축으로 인한 복원력 약화, 과적(過積)과 부실 고박(固縛), 선원들의 운항(조타) 과실 등이 결합한 사고였던 것이다.
우선 배 자체에 결함이 내재해 있었다. 검찰과 법원은 유병언(사망) 전 세모그룹 회장이 실소유주였던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2012년 일본에서 수입해 유 전 회장 개인 전시실과 객실 등을 증축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 인해 배의 무게중심이 51㎝ 올라갔다. 이런 상황에서 배의 균형을 잡는 복원성을 유지하려면 적재 화물을 1448t 감소시키고 평형수(平衡水)를 1324t 증가시켜야 했다. 또 무게가 40t가량인 선수 오른쪽 차량 진입문을 철거해 우현에 부족한 무게를 보충하거나 좌현의 무게를 줄여야 했다.
하지만 청해진해운 경영진은 이런 보완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화물을 최대한 많이 싣기 위해서였다. 세월호의 기준 평형수는 1694.8t이지만 실제 실은 평형수는 761.2t에 불과했다. 또 매출을 올리기 위해 평형수를 비운 대신 최대 화물 적재한도 1077t을 훨씬 넘어선 2142t의 화물을 실었다. 화물 적재량을 관리·감독해야 할 선장 이준석(70)씨 등 사건 관련자에 대한 광주지법의 1심 재판에서 선장과 일등항해사, 청해진해운 물류팀 담당자들은 모두 "세월호에 적재 가능한 최대 화물량이 얼마인지 (사고 전까지) 몰랐으며, 화물 중량을 재는 장비도 없다"고 진술했다.
선원 등 선사 직원들의 직무를 관리·감독해야 할 선사 경영진과 감독 당국도 이들의 안일과 탈법을 묵인하거나 조장했다. 평균 운송수입률(기존 선박의 평균 수입÷기존·신규 선박의 최대 가능 수입)이 낮으면 안전 조치에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에 수입률이 25% 이상으로 유지될 때에만 인가가 나게 돼 있지만, 청해진해운의 2011년 평균 운송수입률은 24.3%였다. 결국 청해진해운은 수입률을 높이려고 여객 정원을 804명에서 750명으로 줄인 허위 계약서를 인천항만청에 제출해 인천-제주 노선의 인가(認可)를 받았다. 한국선급은 선박 중량이 100t이나 적게 산정돼 복원성이 잘못 계산됐는데도 관련 시험 보고서를 승인했다.
◇왜 4·16에 침몰했나
세월호는 앞서 참사 4개월여 전인 2013년 11월 28일 파도에 배가 좌현으로 기울어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는 사고를 당했었다. 2014년 1월 20일에도 '구조 변경 때문에 선박의 무게중심이 이동돼 기울기로 안전사고 위험이 있고, 풍압(風壓) 면적도 과다해 부두에서 이안(離岸)이 어렵다'는 내용의 출항 지연 보고서가 제출된 사실이 확인됐다. 1심 재판부는 "증·개축으로 인해 배의 복원력·안정성에 문제가 발생한 사실을 알면서도 경영진이 수익을 내기 위해 과적을 독려했다"고 지적했다.이처럼 세월호는 침몰의 운명을 안은 채 2014년 4월 15일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인천항을 떠났다. 검찰 수사 결과 세월호는 출항 전 평형수를 933.6t 줄이고 대신 1065t의 화물을 더 실었다. 2단으로 쌓아올린 컨테이너는 밧줄로 둘러 묶는 방법으로 고박했다. 원칙대로라면 바닥에 돌기를 설치해 컨테이너를 꼼꼼히 고정해야 하지만 물류 담당 직원들은 대충 작업을 진행했고 선장 이준석씨와 선원들도 이를 묵인하고 넘어갔다.
출항 이튿날인 4월 16일 오전 8시 48분. 선장 대신 당직 근무를 하던 삼등항해사 박한결(여·27)씨는 조타수 조모(57)씨에게 우현으로 변침(變針)하라고 지시했다. 박씨는 당시 경력이 5개월 정도에 불과했고 맹골수도 해역을 처음 운항하고 있었다. 조타수 조씨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변침이 이뤄지지 않자 조타기를 큰 각도로 돌렸다. 이때부터 잠재돼 있던 참사 요인들이 잠에서 깨어나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복원성이 약한 세월호는 좌현 쪽으로 급히 기울었고, 제대로 고박돼 있지 않던 화물이 좌현 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화물 때문에 배는 더욱더 기울었다.
선장 이준석씨 등 승무원 15명과 청해진해운 임직원 등 11명은 지난해 11월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승객들을 버리고 달아나 피해를 키운 선장 이씨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유기치사상죄를 적용해 징역 36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선고는 오는 28일 오전 10시로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