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한국전력 과장으로 퇴직한 신모(63)씨는 지금은 전기 감리회사 이사다. 한전에서 일할 때는 현장소장들을 관리하는 주임만 20년 넘게 하다 퇴직 직전에야 과장을 달았을 만큼 승진이 늦었지만, 현장 경력 덕분에 재취업에 성공했다. 신씨는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재취업자들은 전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술직"이라며 "부장급 이상 관리직 간부는 없다"고 했다. 그는 "현장에 투입돼 바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만 재취업에 성공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KT의 한 계열사에서 2년 전 본부장급 임원으로 퇴직한 김모(56)씨는 아직 무직이다. 현직 땐 회사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진을 거듭했지만, 재취업엔 실패했다. 김씨는 "다들 '(재취업) 어렵다, 어렵다' 해서 퇴직 전부터 여러 헤드헌팅 업체에 재취업을 의뢰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ICT(정보통신기술) 분야 고위 관리직 출신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눈높이를 낮췄지만 '당장 써먹을 만한 기술이 없다'며 퇴짜를 맞았다"고 말했다.
실버취업 시장에서 기술직 우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만년 주임이나 과장이라도 현장에서 오래 일하다 퇴직한 기술직들은 재깍재깍 재취업이 되는데, 관리직 간부였던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힘겨워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아래에 있던 주임·과장들에게 역전당한 왕년의 관리직 간부 출신 퇴직자들 사이에선 "결국 남는 건 현장과 기술뿐"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난해 한국가스안전공사에서 과장으로 퇴직한 박모(57)씨도 가스배관 설계회사에 재취업했다. 32년간 현장을 지켰다는 박씨는 "책상에서 서류 보고 사인만 했던 동기들은 밖에 나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통달한 주임 출신들이 인기가 좋다"고 했다. 옛 데이콤(현 엘지유플러스)에서 28년간 근무하다 지난해 4월 퇴사한 주모(54)씨도 현장에서 쌓은 기술 덕분에 퇴직 5개월 만에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에 취업했다. 이 회사 박병훈 대표(43)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기술직 출신들은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한다"며 "책이나 보고서를 읽어서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버 시장의 기술직 우위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전국의 직원 10명 이상 중소기업을 설문한 결과, '관리직 출신 중장년 직원을 원한다'는 회사는 2013년 조사 대상 기업의 21.5%에서 2014년 11.4%로 급감했다. '기술직을 고용하겠다'는 회사는 같은 기간 25%에서 27%로 오히려 늘었다.
헤드헌팅 회사인 암롭코리아 박승태 부사장은 "관리직 간부 출신의 이력서는 쏟아져 들어오지만 정작 뽑으려는 기업은 소수인 반면 기술직은 수요―공급 간 격차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박지영 선임 컨설턴트는 "기술직 우대 현상은 사무직이 포화 상태인 것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사무직은 정원의 99.3%가 찼지만, 기술직은 필요 인력의 5%가 비어 있는 상태다.
입력 2015.02.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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