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A 특성화고 졸업반 정모(19)양은 지난해 대학 수시모집에 합격하자마자 한 병원에 취업했다. 대학 입학 전까지 여행과 취미 활동을 하며 지내려 했지만, "어서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알아보라"는 담임 선생님의 성화에 시달렸던 것이다. 정양은 앞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도 환영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담임 선생님이 '공부도 못하는데 무슨 대학이냐' '부모님 등골 빼먹지 말고 그냥 취업이나 하라'고 말해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서울 B 특성화고를 며칠 전 졸업한 함모(19)군은 지난해 9월부터 학교 대신 집 근처 편의점에 나간다. 일찌감치 진학을 포기한 함군은 2학기를 앞두고 '취업하라'는 선생님들의 등쌀에 무작정 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그는 "담임 선생님이 대학에 간다는 친구들보다, 편의점 근로계약서를 가져간 나를 더 반겼다"고 했다. 함군은 "전공을 살려 영화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싶지만 뜻대로 안 돼 급한 대로 전공·적성 다 무시하고 편의점으로 왔다"고 말했다.

공업과 상업, 농생명, 정보 분야 등에서 기술인재 양성을 목표로 정부가 지정한 특성화고(옛 공고·상고) 학생들이 '묻지 마 취업'에 내몰리고 있다. 졸업 시즌을 앞두고 취업률 높이기 경쟁이 뜨거워지면서, 대학에 진학하고도 원치 않는 취업을 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9월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전국 500여개 특성화고·마이스터고의 취업률은 44.2%로, 13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취업난 속 고무적인 소식이었지만 정작 특성화고 학생들은 "거품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 진학 여부나 전공·적성에 상관없이 학교 차원의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억지 취업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성화고들이 이토록 취업에 목매는 건 특성화고 평가 때 '취업률'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해 서울교육청의 특성화고 '교육활동' 부문 평가 지표는 20점 가운데 취업률이 9점이었다. 총 100점인 전체 평가 지표 중 10% 정도지만, 특성화고 간 우열을 가르는 거의 유일한 잣대인 데다 전년보다 취업률이 감소하면 감점도 있었다. 취업률이 교육 예산 배정과 교사 평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특성화고마다 '취업률 높이기'에 사활을 거는 분위기다. 한 특성화고 교직원은 "취업률이 안 좋으면 극단적인 경우 특성화고 재지정 심사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특성화고 취업률은 교육부가 '특성화고 평가 및 재지정 제도'를 도입한 2010년부터 가파르게 올랐고, 대학 진학률은 급락했다.

주 18시간 이상 근무하고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사업장의 근로계약서를 내기만 하면 취업으로 인정된다. 휴대전화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강모(19)군은 "콜센터나 패스트푸드 매장, 카페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도 두 조건만 만족하면 다 취업으로 잡힌다"고 말했다. 서울 C 특성화고 3학년 김모(19)군은 지난해 9월 지인이 하는 중소 사업체에 위장 취업했다. 대학 진학을 원했던 김군은 가짜 근로계약서를 학교에 낸 뒤 등교하지 않고 입시 학원에서 대입을 준비했다.

한 학생은 "일부 졸업생들은 '교육청이 취업률을 조사하는 3~4월까지만 취업 상태를 유지해달라'는 선생님의 부탁 때문에 졸업하고도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한 특성화고 교감은 "학생들의 취업을 독려하는 건 평가 때문이 아니라 취업이 특성화고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선 교사인 남모(55)씨는 "경제가 안 좋기도 하지만 취업률 지표에만 집중하느라 학생들에게 질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찾아주지 못하는 건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특성화고 취업률이 높아진 건 직업 교육·고졸 취업 등을 강화한 정책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며 "학생들의 취업 실태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