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아였다. 난산(難産)이었고, 의사는 그를 꺼내려다 팔을 부러뜨려야 했다. 아이는 쥐처럼 방황했다. 마약을 했고 정신병원에 갇혔으며, 어머니의 자살도 지켜봐야 했다. “만화라는 약물(Gateway Drug)을 통해 비로소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1992년 퓰리처상 수상작 ‘쥐’(Maus)의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Art Spiegelman·67). 그의 자전적 만화 실험을 집대성한 첫 책 ‘브레이크다운스(Breakdowns)’가 지난달 한글판으로 출간됐다. “(제목은) 신경쇠약이란 의미뿐 아니라, 구획·캐릭터 제작 등 만화의 모든 작업을 뜻해요. 제게 이 책은 선언문이자 유언장, 절절히 사랑하는 한 장르를 향한 짝사랑 러브레터입니다.” 지난 5일 미국 뉴욕 사무실에서 그가 전화로 말했다. 한국 언론과의 첫 인터뷰다.

그는 '그래픽 노블' 장르를 통해 만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 책이 훗날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죠. 감히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칭하고 다녔을 정도니까요." 12세부터 만화를 그렸고, 15세 때 지역 신문 '롱 아일랜드 포스트'에 연재를 했다. "'배트맨'을 읽으며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는 그를 미치게 한 건 언더그라운드 만화 잡지 '매드(Mad)'. "만화가 나무나 구름처럼 자연적인 게 아니라, 인간의 지문이 묻은 공예품임을 알게 해줬다"고 했다.

'매드'처럼 탈선적인 만화에 빠지며, 갑갑한 유대교 가풍을 벗어나 히피(hippie)의 길을 걷는다. 향정신성 약물에 손을 댔다. "어설픈 포르노그래피, 존속 살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쾌한 이미지를 그리려 했던 때"라고 말했다. 1968년,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가 집 안 욕조에서 손목을 긋고 자살한다. 스무살, 방황의 방향이 바뀐다. 만화가 저스틴 그린 등과 어울리며 "상상만 할 게 아니라, 현실의 잔혹, 특히 부모가 겪은 참상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아트 슈피겔만이 잉크에 빨대를 꽂고 빨아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다. 그는 ‘19금’ 만화로 유명하지만, 아내와 함께 ‘리틀 릿(Little Lit)’ ‘툰 북스(Toon Books)’ 등 유아용 그래픽 노블 잡지도 내고 있다. 그는 “내 아들 딸도 모두 만화로 글을 뗐다”고 말했다.

1972년 세 쪽짜리 '쥐' 습작이 탄생한다. 선전 영화 속 게토 주변에 우글대던 유대인과 하수구의 쥐 떼를 연결한 이미지에서, 아우슈비츠를 겪은 아버지의 얘기를 떠올린 것. "원래는 미국의 흑인·백인을 쥐·고양이에 대입해 그리려 했어요. 근데 저 역시 흑인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백인이었죠. 그래서 제 뿌리, 유대인을 그린 겁니다." 그가 창조한 미키 마우스는 '브레이크다운스'에 실린 첫 작업이었다. 이후 섹스·폭력이 주는 파격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브레이크다운스'는 외형의 파격(가로 254㎜·세로 356㎜)뿐 아니라, 독일식 표현주의·큐비즘 등의 그림체 실험으로 가득하다. '브레이크다운스'는 1977년 미국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가 죽자 출판사가 모든 자금을 추모 앨범에 쏟아붓느라 출간이 무기한 연기됐다. 1년 뒤 겨우 빛을 보게 됐지만 그나마도 5000부 중 절반이 파기됐는데, 인쇄공들이 책 속 '욕망의 작은 신호들'의 성교 장면을 보느라 인쇄 사고를 냈기 때문. 공교롭게도 한국판 역시 잉크가 번지는 인쇄 사고를 겪어 출간이 한 달이나 미뤄졌다. 난산의 연속. 그는 "팔이 부러져도 끝까지 인쇄 만화의 최전선에 있을 것"이라 선언했다. "인쇄물은 함께 나이를 먹어가죠. 만지고 쥘 수도 있고요. 불타지 않는 한."

☞그래픽노블(Graphic Novel)

문학작품처럼 예술성 깊은 작가주의적 만화를 통칭한다. ‘문예만화’로도 불린다. 1970년대 미국에서 가장 먼저 등장했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1992년 퓰리처상을 받으며, 그래픽노블의 예술적 가치를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