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도 '갑을 관계'가 있다. 작가가 '갑'이라면 관객은 '을'이다. 관객은 작품을 '수동적으로' 바라본다. 작품 앞에 설치된 안전 바를 넘어서도 안 된다. 최근 현대미술에선 관객이 직접 만져보고 개입하는 참여형 작품이 많이 나오지만 이 역시 정해진 시나리오 틀 안에서만 작동한다는 한계가 있다.
서울대미술관(관장 김성희)의 올해 첫 기획전 '숭고의 마조히즘'은 전시장의 갑을 관계에 대한 통찰과 전복을 다룬다. 주민선 학예연구사는 "숭고라는 감정은 당혹스럽고 불편하면서도 감탄과 경외심을 느끼는 감정이고 마조히즘 역시 타인에게 물리적·정신적 고통을 받으면서 만족을 느끼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며 "이 이중적 심리를 파고드는 전시"라고 했다. 1970년대생 작가 7명의 설치와 영상, 사진 등 15점을 선보인다.
'전시 공간에서 작품과 관객 중 누구에게 더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작가는 슬픔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작품을 통해 기쁨을 느꼈다면 작품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전시장 입구 바닥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다. 사진작가 임상빈(39)의 콜라주 '뉴욕공립도서관'이 우선 눈에 띈다. 도서관 앞 계단엔 사람들로 빼곡하다. 작가가 뉴욕 곳곳의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따로 찍어 정교하게 붙인 것이다. 다른 작품 '뉴욕현대미술관'(MoMA·사진)은 미술관 곳곳에 흩어진 작품을 일일이 찍어 한곳에 붙였다. 주 학예사는 "얼핏 보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관객이 속기 쉽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합성한 것"이라고 했다.
미디어아티스트 오용석(39)은 다양한 영화에서 수평선이 나오는 부분만을 수집해 편집했다. 원래 영화는 감독의 권력이 집중된 장르다. 특정 시점에서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감독의 시선이 주입된다. 오영석은 이 권력을 해체하고자 했다. 하늘과 바다, 수평선이 나오는 장면을 수집해 끊임없이 연결했다.
정재연(36)의 작품 '~라는 제목의'는 작명을 아예 관객 몫으로 넘겼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철제봉과 로프, 공이 설치돼 있다. 관객은 작품을 마음껏 만지고 체험한 후 떠오르는 제목을 흰 벽에 쓰면 된다. 구동희(41)는 서울대미술관에 비치된 안전 바 수십 개를 모아 미로처럼 바닥에 설치했다. 미로를 통과하려면 안전 바를 넘어야 한다. 관객은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안전 바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복에서 오는 쾌감을 느낀다. 4월 19일까지. 관람료 일반 3000원. (02)880-9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