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석(58) 법일정밀 대표가 손목 굵기의 쇳덩이를 들어 보였다. 초음파 금속융착기다. 현장에선 혼(Horn)이라고 부른다. 초음파를 이용해 전기에너지를 진동에너지로 바꿔 순간적으로 강한 마찰열을 발생시키는 기계다. 이 열로 서로 다른 금속을 접착시킨다. 마찰열이 조금만 약해도 붙지 않고, 강하면 녹아버린다. 휴대폰 배터리 내부의 구리 호일과 외부 단자를 연결할 때 쓰인다. 이 도구의 정밀도가 배터리의 성능과 수명을 좌우한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것을 국산화해 원가를 70% 이상 절감했어요. 독일·일본의 정밀부품도 결국 사람이 만드는 건데, 왜 나라고 못 만들겠나.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죠."

명장은 문화·예술·전통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세한 차이로 산업 지형을 바꾸고 혁신을 가져오는 기술 또한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전산응용가공 부문 대한민국 명장인 서정석이 그렇다.

서정석 대표가 금속을 절삭할 때 쓰는 밀링머신 작업대에 앉았다. 초음파 금속융착기 제작을 위한 대형 선반과 밀링머신은 젊은 기술자 양성을 위한 필수품이다. 그의 공장 근로자는 대부분 20~30대다.

수입에 의존하던 많은 정밀기계가 그의 손을 거쳐 국산화됐다. 기술특허만 9개 갖고 있다. "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기술사(최고등급 기술자격)가 되면 박사 대우 해주겠다'고 했잖아요. 내 손재주 하나 믿고 나섰죠."

중1 때 고무판화용 무딘 칼로 가족과 친구들 도장을 만들어줬다. 시계도 수리했는데, 시계방 직원이 수리하는 모습을 눈여겨본 게 다였다고 한다. 중학교 마치고 열일곱 살이던 1975년 상경해 기술학원과 직업훈련원에 다녔다.

창원 방산업체에 취직한 그는 벌컨포 약실 제작에 투입됐다. "미세한 오차에도 불량이 납니다. 중졸에 직업훈련원 출신인 저의 첫 목표는 부산기계공고 출신들을 이기는 거였어요. 걔들 붙잡고 끈질기게 물었지요. 3년 지나니 제가 만든 약실은 믿고 검사도 안 하더군요." 창원에서 그는 당시 한국인에겐 '신성불가침'처럼 여겨졌던 정밀기술에 관심을 가졌다. 선진 기술업체들이 옆 도시인 마산의 수출자유지역에 몰려 있었다. 사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현격한 기술 격차를 인정할 건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볼 것인가… 한번 해보자 결심했죠."

그는 80년대 후반 인천으로 옮겨 독립했고, 1991년 첫 작품으로 트럭용 유압 실린더를 개발했다. 이 역시 전량 수입하던 제품이다. 90년대 중반 휴대폰이 국내에 들어올 때 배터리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같이 일하던 직원이 초음파를 다루는 외국계 회사로 갔어요. 그때 초음파에 대해 처음 알았죠." 서정석이 만든 융착기는 자동차 단자 접합, 타이어 절단, 플라스틱 접합 등 다양하게 쓰인다.

기술사를 넘어 명장이 됐지만, 박사 대우는 없었다. 그는 기술자를 존중할 줄 모르고 도적질을 일삼는 곳이 대기업이라고 했다. 첫 작품부터 그랬다. 유압 실린더를 개발해 대기업에 납품한 지 1년 지났을 때다. "갑자기 납품업체를 바꾸겠다는 겁니다. 제가 개발한 제품인데 누가 만든다고 저러나 황당했죠. 실사(實査)를 명분으로 공장에 찾아와 핵심기술에 대해 캐묻고 설계도면까지 요구하던 대기업 간부의 친구가 차린 회사더군요. 당시 돈으로 2800만원어치 재고를 달랑 14만원 받고 고물상에 넘겼어요."

금속융착기도 비슷했다. 그의 제품을 사오던 배터리 제조사도 특허를 내더니 온갖 트집을 잡아 그를 내쳤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그 회사에서 다시 찾아왔어요. 제 것 베끼면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불량률이 높아 손을 든 거죠. 이런 횡포에 문 닫는 중소업체가 한둘이 아닙니다."

2009년 그는 인천대 기계공학과 대학원에 들어갔다. 지난해엔 초음파 금속융착기술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쓴 이 분야 논문만 18편이다. "이제 와서 박사 대우 받자고 진짜 박사가 된 건 아니죠. '산업현장교수' 활동이 보람 있어요. 해마다 20명에게 금속가공 기술을 가르쳐요. 인천 지역 마이스터고 학생 100명도 제게 배웁니다. 젊은 후배 기능인들을 키우는 데서 희망을 찾습니다. 이 친구들이 장차 기술강국 한국을 만들어 줄 거라 믿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