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일본계 제약회사에 다녔다. 회사의 총무랄까, 잡무를 담당하는 세뇨르 브루게라스는 내게 스페인 문화며 음식에 관한 깊은 지식을 들려주곤 했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와서 처음으로 '안초아'(anchoa·사진)를 먹은 얘길 했더니, 세뇨르 브루게라스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내 고향이 있는 비스케이만(灣)의 안초아가 지중해 것보다 몇십 배나 맛있어. 다음 휴가 때 선물로 갖다줄게요." 결국 나는 그 맛을 보지 못하고 스페인을 떠났다.
스페인어로 안초아, 한국과 일본에서는 영어식으로 안초비(anchovy)라고 부르는 재료는 멸칫과의 작은 물고기다. 내가 한국에 온 지 꽤 지났을 무렵에야 프랜차이즈 피자에 안초비가 올라가고, 레스토랑에서 안초비를 넣은 샐러드를 내놨다. 8년 전 요리 교실을 시작할 무렵에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살아본 학생들이 안초비를 알았다. 수업 중 안초비 캔을 따면 "선생님, 그거 안초비죠? 비려서 싫으니 조금만 넣어주세요"라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샐러드에 안초비를 넣어도 싫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2년 전쯤부터다.
한국에서는 통째로 소금에 절여 발효한 멸치젓이나 멸치액젓, 거제도나 제주도의 신선한 멸치회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하지만, 일본에서는 말려서 육수용으로 쓰거나 달짝지근한 멸치볶음으로 먹는 정도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는 안초비 내장을 제거한 뒤 살을 저며 염장한다. 냉암소에서 발효해 소금기를 씻어내고 올리브 오일에 절여 캔이나 병에 담는다. 나는 스페인을 중심으로 지중해 요리를 가르치고 있어서, 수입 안초비 캔을 제법 많이 쓴다. 피자·파스타· 카나페 위에 올린 안초비는 친숙한 메뉴고, 다진 안초비를 샐러드 드레싱에 섞거나 닭가슴살에 안초비를 말아서 굽기도 한다.
요즘 우리 집 냉장고 아래 칸에는 4㎏에 가까운 염장 멸치가 용기에 담겨 진을 치고 있다. 작년 4월 부산 기장시장에서 주문한 멸치 10㎏ 중 일부다. 서울로 배달된 멸치를 요리 동료와 카페에 모여 함께 염장했다. 각자 가져온 용기에 저민 멸치를 담고 소금을 치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고무장갑을 꼈는데도 소금기 때문에 종일 손이 가려웠다. 염장한 멸치는 3개월 발효하고 깨끗이 씻어서 올리브 오일에 절인다는데, 우리 집 염장 멸치는 아직 발효 상태 그대로다. 연말 파티 때 몇 마리 꺼내 올리브 오일에 버무렸더니 조금 짰지만, 아주 훌륭한 맛이었다.
올해 정월은 부산에서 보냈다. 부산에 사는 스페인 지인 부부에게 점심식사를 초대받아 갔다. 냉장고의 안초비를 올리브 오일에 절이지 않고 해를 넘겨버려 영 찜찜했는데, 우연히도 그날 메인 요리가 스페인 안초아였다. 그 댁 시부모님께서 머나먼 스페인에서 선물로 가져오신 것이었다. 시아버지께서 매년 가을 고향에서 가까운 비스케이만의 멸치를 발효해 만든다고 한다.
20여년 전 세뇨르 브루게라스의 말대로 비스케이만의 안초아는 안초비 캔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살이 통통하고 맛있었다. 지인의 시아버지께 "냉장고 안초비가 걱정"이라고 말씀드렸더니 "9개월 정도 염장해도 괜찮다"고 하셨다. 아, 한국의 멸치젓과 통하는 것이 있구나. 스페인 어른께서는 "나중에 우리 고향에 오면 스페인식 안초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셨다. 아아, 빨리 본고장의 안초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