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전 7시 11분쯤 서울 성동구 홍익동의 한 다세대주택 2층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2㎞ 떨어진 광진소방서 행당119안전센터에서 7t 펌프차 등 소방차량 16대가 출동했다. 거리상으론 2~3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화재 현장으로 가는 폭 5m의 이면도로 양쪽은 불법주차 차량이 차지하고 있었다. 2~3분을 가다 서다 150m를 기어가던 소방차 앞을 대형 정화조 차량이 막아섰다. 유명상 소방대원은 "사이렌을 울리고 차량에 달린 확성기로 차를 빼달라고 외쳤지만 누구 하나 차를 빼지 않았다"고 했다.
소방차는 결국 현장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멈춰서야 했다. 불이 난 주택 앞길은 폭이 2.5m였는데 주차된 차들과 이런 저런 시설물 때문에 폭 2.3m의 펌프차가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소방대원들은 15m짜리 호스를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호스 12개를 이어붙인 뒤에야 화재 지점 앞에 겨우 닿을 수 있었다. 호스 연결에만 3~4분이 흘렀다. 호스에서 물을 뿜기 시작한 것은 첫 신고부터 거의 10분이 지난 뒤였다.
광진소방서 장형 팀장은 "불이 난 주택 안에는 30대 남성이 있었다. 1분만 더 늦었다면 부상이 아니라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눈앞에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는 걸 보면서도 불법 주차 차량 때문에 앞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소방대원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고 말했다.
초(秒)를 다투는 전국의 화재 현장에서 불법 주차 차량이 불을 키우고 있다. 대부분의 화재는 불이 난 지 5분 안에 진화를 시작하지 못하면 연소 확산 속도와 피해 면적이 급속도로 증가한다. 중앙119구조본부 관계자는 "화재 발생 5분, 즉 골든타임을 놓치면 매 1분마다 불길의 크기는 10배씩 커진다"고 했다. 지난 10일 주민 4명이 숨지고 126명이 중경상을 입은 경기도 의정부시 아파트 화재 때도 아파트 입구 양쪽에 불법 주차된 20여대 차량들로 소방차 현장 진입이 10여분 이상 늦어지는 바람에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민안전처 중앙소방본부의 2014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소방차 진입이 불가능한 지역이 1600구간, 도로 길이로는 716㎞에 달한다. 주거지역이 60%인 968구간(428㎞)으로 가장 많다. 전통시장 등 상업지역이 349구간(137㎞)으로 그다음이다. 서울의 경우 도로 폭이 소방차가 통과하는 데 필요한 최소 폭 4m 이하이거나 불법 주정차한 차량, 전신주 등이 소방차량 접근을 방해하는 '소방차 통행곤란지역'은 총 466구간(도로 길이 약 23㎞)이다. 조선일보 취재팀이 서울소방재난본부와 함께 불법 주차가 가장 심각한 곳으로 꼽히는 다세대 주택, 재래시장, 지하주차장 없는 아파트를 차례로 점검했다.
13일 오후 서울 관악구 대학동(옛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선 관악소방서 지휘차량은 가게가 즐비한 폭 10m의 큰 길을 두 차례 빙빙 돌았다. 모의출동훈련에 나선 지휘차량은 대학동 치안센터 사거리 왼편으로 난 폭 5m의 이면도로로 간신히 들어갔지만 50m를 직진한 이후 왼편으로 난 또 다른 이면도로는 그대로 지나쳤다. "이쪽은 도로 폭이 3m로 좁고 중간에 전봇대가 있어 폭 2.3m의 펌프차가 들어갈 수가 없어요."
지휘차를 운전한 최영탁 소방교가 가르킨 교차로 인근에는 승용차 2대와 중형차 1대가 주차돼 있었다. 최 소방교는 "펌프차에 저장된 소방용수가 대형 펌프차는 2000리터, 소형 펌프차는 1200리터인데, 이도 모자르면 소화전을 사용하지만 좁은 골목길에 마구잡이 주차가 돼 있을 경우에는 소화전을 이용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마포구 성미산 자락 다세대 주택 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연세대에서 성산대교로 이어지는 성산대로에서 한 블록만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폭 5m 정도의 좁은 골목길과 그 좌우에 세워진 불법주차 차량들이 소방차의 진입을 가로 막았다. 마포소방서는 이곳을 출동취약지역으로 정하고 일반 소방차보다 폭이 10% 정도 좁은 '특수' 차량을 인근 119안전센터에 배치했지만, 그마저도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긴급상황에서 불법주정차 차량들을 끌어낼 장비나 인력도 모두 부족하다. 서울소방재난본부가 보유한 견인차 4대가 서울 전역을 담당하다보니 견인차가 소방차와 함께 출동하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아주 큰 화재가 나면 같이 출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마저도 광진소방서에서 필요한 견인차가 동대문소방서에서 출동하는 것과 같이 견인차가 멀리서 오는 경우가 많아 초기대응엔 무용하다는 지적이다.
상습적인 골목길 불법주차는 소방관들의 출동 경로도 바꿨다. 소방관들은 불법주차 차량이 많은 골목길은 아예 막힌 길로 가정하고 도로를 우회한다고 했다. 소방차 전용 내비게이션 '소방안전지도'엔 몇몇 골목들이 노란색 블록으로 막혀있다. 상습 불법주차 구역으로 소방차가 지나갈 수 없다는 표시다.
광진소방서의 한 소방관은 "그 길은 처음부터 없는 길이라 생각하고 핸들을 잡는다"고 말했다. 예컨대 이면도로에 불법주차된 차량들이 버티고선 서울 광진구 화양동 지하철 건대입구역 1번 출구 부근은 화재가 나면 300m 똑바로 직진해서 갈 수 있는 거리를 9번이나 꺾어 1.5㎞ 거리로 우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