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영어 한 문제당 주어진 평균 시간은 대략 94초다. 길고 복잡한 논리로 무장한 독해 지문을 그 시간 안에 풀어내기는 미국이나 영국의 웬만한 대학교를 졸업한 원어민에게도 결코 쉽지 않아서 5분(300초)을 줘도 헷갈리다가 틀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처럼 어려운 문제를, 영어를 포기한 수험생 일명 영포자도 3초 안에 정답을 고를 수 있다면?
지난 11월 13일 수능 시험 날짜에 '미국인이 수능 어려운 문제 풀기'라는 제목의 재미난 동영상이 유튜브에 게시됐다. 동영상에 따르면 이 원어민은 미국 상위 5위 안에 드는 컴퓨터공학과 출신의 미국 여성인데, 수능 32번 문항을 5분 동안 끙끙 앓다가 결국 답을 놓쳤다. 그녀는 "나도 미국 사람이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몰라. 내가 멍청한 건가?"라며 바짝 주눅 든 표정으로 어렵다고 했다.
실제로 EBS 교재에는, 원어민조차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지문이 많다. 답지에 나온 해설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것은 학생뿐만 아니라 지도하는 교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어려운 지문을 영포자가 문제를 보자마자 답을 맞히는 역설이 현재의 물수능 영어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다.
며칠 전 필자는 개인 과외를 하고 있는 후배와 통화하다가 충격적 사례를 듣고 경악했다. 그 후배는 원점수 40점대(6등급)의 영어를 포기한 재수생을 무려 90점대의 2등급으로 만들었는데 그 비법은 가히 놀랍다. 단어만 암기시키고 EBS 교재에서 영어는 빼고 한글 해설만 이해하도록 가르친 게 그 비법이다. 이 재수생은 3초 만에 EBS 연계 지문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올해 수능 성적표가 배부되자 물수능에 대한 원성이 높다. 영어에서는 역대 수능 사상 최고치인 1만9564명(3.37%)이 만점을 받았다. 한 영어 사이트에 올라온 글은 허탈 그 자체다. '루시앙의 청춘'이라는 아이디 작성자가 '물수능, EBS 연계, 2015년 영어에 대한 짧은 평가'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의 댓글에는 한숨이 가득하다. "발로 푸는 문제, 언제부터 영어가 한글 암기 과목이 되어버린 거죠?" "이건 수능시험이 아니라 EBS 시험이죠."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 '눈에 띄는 새 책'으로 'EBS 영어 지문 3초 서머리 B형'이 선정된 것은 물수능의 문제점이 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영어 지문을 보자마자 딱 3초면 100% 생각나게 지문의 '첫 문장'과 '중심 문장'을 수록하고, 한글로 해석을 해두어 단박에 지문을 파악할 수 있다"고 광고한다. 영어 시험인데 한글 해석본을 보는 게 고득점 전략이 된 작금의 기현상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