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고인경 파고다그룹 전 회장이었다. 본지에서는 지난 10월호에 를 보도했었다. 이혼소송 1심 판결(9월 28일) 후 박경실 회장의 심경을 실은 기사다. 보도 약 2개월 이후. 고 전 회장을 만났다. 억울하다고 했다.
여느 다툼이 그렇듯 양측 입장은 극명하게 갈린다. 고 전 회장과의 만남. 괜히 또 다른 분란을 야기할까 내심 걱정했다. 다행히 고 전 회장은 이러한 입장을 이해하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간 언론에 먼저 나가서 무슨 해명을 한다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조용히 법으로 밝히면 되니까요. 그러나 잘못 비춰지고 있는 억울한 제 입장은 해명하지 않으면 마치 사실로 굳어질까 봐서 그때그때 해명키로 했습니다. 박경실 회장을 음해하거나, 명예를 훼손하거나 하는 어느 발언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을 뿐입니다."
한남동의 한 아파트. 그의 서재 책상 위에는 본지 기사가 스크랩돼 있었다. 고 전 회장은 기사를 한 구절 한 구절 짚으며 반박하겠다고 했다.
끝까지 가정을 지키려 했다?
박경실 회장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지난 9월 28일 둘의 이혼소송에 대한 1심 판결이 났다. 직후 본지에선 박 회장의 자택을 찾았다. 박 회장은 인터뷰에서 "끝까지 가정을 지키려 했다. 가능하면 다시 가정을 되찾고 싶고, 고 전 회장과는 여전히 가족이고, 종국에는 (고 전 회장과) 함께할 수밖에 없을 거다. 남편이 이혼소송을 한 데 대해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 외에도, 연애 초기 및 결혼 과정, 그리고 함께 학원을 운영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실었다. 그때만큼은 알콩달콩하게 그려졌다.
"끝까지 가정을 지키려 했다고요? 그런 사람이 한평생 파고다를 위해 일해오고 파고다를 설립한 남편을 내쫓습니까? 절 내쫓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자리(회장직)에 본인이 앉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큰딸까지 내보내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4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면서 자식처럼 키운 학원을 아내에게 모두 빼앗겼습니다."
결혼 직후부터 엇나간 부부 사이
둘은 지난 1978년 처음 만났다. 당시 고 전 회장은 35살인 이혼남이었다. 전부인과의 아이도 둘이나 있었다. 그때 박 회장은 23살이었다. 지인을 통해 테니스를 치며 만났던 둘은 이듬해 결혼했다. 전부인 사이에서의 남매와 박 회장이 결혼 후 낳은 1녀까지 총 3남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한데 둘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박경실 회장은 "2004년께부터 둘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면서 "큰딸(전부인 사이에서의 딸 고은○ 씨)이 생모가 아닌 걸 안 시점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해, 부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고 전 회장은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이제와 가만히 돌이켜 보면 결혼 초반부터 부부간 맞지 않았지만 죽을 만큼 노력하면 고쳐질 줄 알았는데, 그게 잘못입니다. 현재의 가사소송의 이유가 마치 부부 사이엔 아무 문제 없는데 큰딸이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돌변해서인 것처럼 비쳐지는데요, 큰딸은 제가 생후 7개월부터 키워오다 3살부터 박경실 씨를 엄마로 만났기 때문에 박 씨를 평생 엄마라고 믿은 아이입니다. 딸아이가 삐뚤어진 게 아니고요, 박 씨가 큰딸과 막내딸을 심하게 차별했습니다. 알다시피 큰아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잖습니까.(큰아들은 지난 1994년 자살했다. 박 회장은 학교폭력으로 자살했다고 한 언론을 통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 전 회장은 자살 이유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런데 큰딸마저도 똑같이 잃을 순 없잖습니까."
이날 인터뷰 장소에는 큰딸 고은○ 씨도 함께 있었다. 그는 이따금씩 옆에서 고 전 회장의 얘기를 거들었다. 그러다 박 회장의 이름을 언급할 때는 진정하기 힘든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엄마(박 회장)에 대한 배신감에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했다"면서 "그런데 저보고 '쟤 쇼하는 거'라면서 비웃었다"고 했다.
앞서 박경실 회장은 고 전 회장이 데려온 남매를 친자식처럼 돌봤다고 말했다. 큰딸인 고은○ 씨는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와 나란히 TV를 시청한 일이 없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자살을 시도한 날, 파고다 직원들과 회식을 하러 가더라고요. 자살 기도에 실패하고 다음 날 학원에 출근했을 땐, 직원들에게 '걔 왔냐?'라고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 밖에도 저 없는 자리에서 제가 정신이 조금 아픈 애라고 소문을 내기도 했고요. 결국 작년에 학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 전 회장은 "대놓고 큰딸을 비웃는 것을 보고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파고다, 내가 일군 학원
특히 속이 타는 건 따로 있다. 본인이 반평생 일궈온 파고다학원이 마치 ‘박경실 회장’이 일군 것처럼 보도된 점이다. 박 회장은 고 전 회장을 ‘결혼 직후 함께 학원을 운영하던 동반자’라고 언급했었다. 체대를 졸업한 박 회장은 개성상인이던 어머니를 통해 일찍이 경영 마인드를 습득할 수 있었고, 이러한 밑바탕으로 실무에 바로 투입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말에 고 전 회장은 통탄을 금치 못했다.
“회사 초창기, 박 회장은 평생 운동만 하다 갓 체대를 졸업한 20대였습니다. 교육이나 영어에는 문외한이었어요. 학원에 들러 현금을 수금하고 은행에 입금하는 일을 하는 게 다였어요. 청소부터 경영 전반까지 담당했다고 했던데, 청소는 했지만 경영한 사실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포목점을 운영해서 경영 마인드가 있었다고요? 참 그럴싸한 얘기네요.”
고 전 회장은 설립 초기 자신의 업적 등을 박 회장이 마치 본인이 한 것처럼 얘기한다고도 덧붙였다. “파고다 설립 전, 시장조사를 했다는 말을 했던데요. 그 당시 죄다 토플, 리딩, 리스닝 위주이고 회화학원이 없어서 회화학원을 하기로 했다고요? 그건 경영자인 제가 한 겁니다.”
실제로 고 전 회장은 학원교육 외길을 걸었다. 입시 그룹과외 선생, 영어강사, 학원 운영, 학원 인수 등을 통해서다. 서울대 교수였던 부친이 빚보증을 서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세가 기울었고, 네 식구가 한방에서 자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 즈음부터 기숙 가정교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당시(1963년) 기숙 가정교사로 재벌가의 딸을 비롯해 정계, 재계 유명인사들 자제들의 입시 전담을 하며 경기여중, 이화여중 등 학생 모두를 당시 최고의 학교에 입학시키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69년부터는 신문로 광화문에 영어전문교육의 과외교습소를 운영하게 됐다. "말이 과외교습소지, 광화문 한글학회 옆 빌딩과 한옥집을 모두 임대해서 강의실로 사용하는 기업형이었습니다. 학생이 120~150명, 강사가 10명 내외였으며 수강료가 고액이어서 세무 조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하던 시사영어학원의 총매출과 매출이 같을 정도니 '고선생'의 명성이 대단했었죠."
이후 고 전 회장은 YMCA, 중앙고시학원, 금자탑학원에서 강의를 했고, 신국제외국어학원, CCB외국어학원, 종로외국어학원에서 부원장을 거쳐 원장으로 몸담기도 했다. 그 후 CCB 성인 외국어학원을 운영하며 한미외국어학원 인가 등록증을 인수해 ‘파고다’ 간판을 건 게 지금의 파고다그룹의 전신이다.
“내세울 학벌도 가진 큰 자본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잠자는 시간 외에는 오직 학원 성장에만 신경 쓰며 학생들의 실력 향상에만 승부를 걸었습니다. 무일푼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성공의 속도는 대단해 박경실 씨와 결혼 후 1년 차에는 20평짜리 아파트를 매입해 이사했고, 3년 차에는 망원동에 있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 매입 이사, 5년 차에는 망원동에 140평의 2층집을 매입 이사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박경실 씨는 경리직원에 불과했어요.”
주총 통한 퇴임? 쫓겨난 것
그러던 고 전 회장이 갑자기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지난 2013년. 학원사업을 한 지 45년 만이었다. 물러난 경위에 대해서는 지금도 법정 공방이 펼쳐지고 있다. 박 회장은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 안식년을 가졌고 그 사이에 합법적인 주주총회와 남편의 동의를 통해 퇴임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 전 회장의 주장은 다르다. "안식년을 갖기로 했어요. 안식년이라 하기도 뭐한 얼마간의 휴식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비서에게서 전화가 와서 제가 퇴직처리 됐다는 겁니다. 두 달 만에 바로 업무에 복귀해 매일 사무실에 출근을 했어요.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 결과 박 회장이 그의 서명을 위조하고, 서류를 꿰맞춰놓은 걸 발견했다. 고 전 회장은 "그뿐만 아니라 쉬었다가 돌아오니, 직원들 앞에서 회장인 제가 수치심을 못 참을 정도로 모욕을 주더라"면서 "모든 재산들을 합법적인 절차를 위장해 다 옮겨놨으니 내쫓겠다는 심산이었음을 그때 확신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박경실 씨는 제가 없는 동안 맡겨놓은 인감도장과 서명 위조로 제 주식지분을 자식들에게 이동시켰어요. 자신이 대주주가 돼 나를 2013년 3월 27일 나를 하루아침에 맨몸으로 쫓아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이래 늘 승승장구 성장했기에 아내에게 경리를 맡긴 게, 내부 살림을 맡긴 게 잘못입니다. 법인이 돼서도 개인사업자 때처럼 자연스레 아내가 돈 관리를 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엄청난 불행을 낳은 동기가 됐죠. 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30년 함께한 부인을 법의 심판대에 올리는 잔인한 남편이 되지 않으려 많은 기간 노력해왔습니다. 한평생을 파고다에 몸 바친 내가 늘그막에 존경받아야 하는데 어느 한 사람의 사욕 때문에 불가능하게 됐다면, 이 불의를 법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바로잡고 제 명예를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부부는 여러 언론에 이혼이 확정된 것처럼 보도됐다. 하지만 아직 진행 중이다. 1심 판결 이후 양측 모두 항소한 상태다. 예상했던 것처럼, 두 사람의 입장은 극명하게 갈렸다. 테니스를 치며 만났다는 것 외엔 모든 게 달랐다. 박 회장과 함께 살았다던 한남동의 한 아파트에서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여느 때 석양처럼 운치는 없었다. 그저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