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이거나 독하거나. 배우 김서형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다. 그가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틀은 분명히 존재했다. 희대의 악녀 신애리로 분한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2008)의 여운이 너무 강렬했다. 이후 여러 작품이 그를 지나쳐 갔지만, 시청자들은 각기 다른 캐릭터를 신애리의 변주처럼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 20일 개봉한 영화 ‘봄’은 김서형에게 다양한 얼굴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말하는 작품이었다.

그는 극 중 헌신적인 아내 정숙 역을 맡았다. 한 가족을 파괴한 신애리와는 정 반대편에 있는 인물로, 이름 그대로 정숙하고 단아한 여인이다. 소리 한번 지르는 법 없다. 성공한 조각가인 남편 준구(박용우)가 죽음을 앞두고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자, 그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자 물심양면으로 노력한다. 정숙은 남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을 여인 민경(이유영)을 우연히 만나고 그를 찾아가 누드모델을 제안한다.

조각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누드모델. 묘한 긴장감이 형성될 법하지만, ‘봄’은 이런 뻔한 전개를 깨는 데 주력한다. 삶과 예술을 향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그려질 뿐이다. 정숙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너무 뒤늦게 응답받는데,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누르던 정숙은 그제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이를 극적으로 표현한 김서형의 연기는 탁월했고, 그는 2014년 마드리드국제영화제 외국어영화 부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의외라는 반응은 인터뷰하면서 들었어요.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정숙이란 캐릭터를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지방 촬영이라 재미있겠단 생각도 했죠. 실제로 소풍간 듯 촬영했어요. 쉬는 날엔 여자 스태프들과 산에 놀러가곤 했어요. 배우이기 때문에 연기에 대한 고민은 늘 있어요. 하지만 정숙이기 때문에 어렵거나 힘들었던 점은 없었어요. 일상적인 인물은 많이 해보지 않아서 달랐겠지만, 정숙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정숙은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지 않는다. 신뢰의 표현이지만, 단 한 번도 찾지 않는다는 점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김서형도 연출인 조근현 감독에게 여러 번 물었던 대목이었다. “정숙은 원래 그런 사람”이란 답이 돌아왔다. 김서형은 자신이 캐릭터를 재창조시키기보다, 조 감독을 따르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영화는 조 감독의 의도대로 매우 담백하게 그려졌다. 실제 자신이라면 사람을 심어서라도 지켜봤을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덧붙였다.

정숙이 늦은 밤 방죽 위를 걸어가는 장면은 꽤 아름답다. 김서형은 발레를 하듯 빙글빙글 돌아가는데, 우아한 몸짓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정적인 신이지만, 실제 촬영장은 몹시 더웠고 모두 지쳐있었다. 다만 틀어놓은 클래식 음악을 좋았고, 김서형은 그 느낌 그대로 촬영했다. “해당 신을 찍고 제작진끼리 자화자찬을 했다”고 말한 그는 “그 배경과 그 조명에선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득을 봤다”고 웃었다.

그는 경상댁(윤예희)과 함께 울던 장면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았다. 너무 많이 울었다. 울지 않아도 되는 촬영 장면에서도 울었다. 두 사람의 눈물에 조 감독은 놀랐다. 상황에 몰입이 된 상태에서 감정이 뒤죽박죽이었고, 김서형은 자신의 뒤에 놓인 관을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언론시사 후 기자간담회에서도 눈물을 보인 그였다. 그는 “한이 많은가…”라고 말끝을 흐리더니 “그런 감정선이 있어서 배우를 하나보다”고 말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가 기자간담회에서 울었던 이유로 옮겨갔다. MBC 시트콤 ‘엄마가 뭐길래’(2012)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초 120부작으로 기획됐지만, 시청률을 이유로 단 27회 만에 조기종영한 비극적인 작품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사전에 감지했던 김서형은 불안한 마음으로 작품에 투입됐다. 열악한 시트콤 제작 환경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당시 MBC 예능프로그램 ‘라디오스타-황금어장’에 출연한 김서형은 녹화 도중 숙면을 취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김서형은 시트콤의 묘미와 재미를 깨우쳐 갔다. 그렇게 고군분투했지만 방송 두 달 만에 종영했다. ‘폐지’란 단어가 주는 충격도 컸지만, 김서형은 이 소식을 시청자와 함께 뉴스로 접했다. 대선배 나문희마저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누군가를 원망할 일도 아니지만, 그에겐 상처로 남았다. “소통이 잘 됐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많은 것을 이뤘다. MBC 드라마 ‘기황후’와 ‘개과천선’에서의 남다른 존재감과 화면 장악력이 그것이었다. 특히 ‘개과천선’은 특별출연으로 출연해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김서형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결을 묻자 몇 가지 전략이 있다고 했다. 대본을 철저하게 분석한 후 디테일을 만들어낸다. 현장에서는 촬영 분위기에 잘 부합하는지 점검한다. 계획을 수정할 땐 본능에 따른다. 말이 쉽지 오랜 경험과 타고난 감각을 요하는 작업이다.

“운이 좋았어요. ‘개과천선’은 김명민이란 배우에 대한 궁금증이 컸어요. 검사 역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매력적이었죠. 하지만 뒤로 갈수록 시간은 쫓기고, 대본은 긴박하게 나왔어요. 법률 용어 때문에 대사가 도통 외워지지 않았어요. 연기하면서 그렇게 엔지(NG)를 많이 낸 적이 없어요. 민망했던 적도 많아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더니, 더 좋은 반응을 얻었던 것 같아요.”

천생 배우인 김서형의 일상이 문득 궁금했다. 왠지 평소에도 작품에 골몰하고 있을 것 같은 그였다.

“설마요. 일상은 너무 평범하죠. 쉬는 날에는 TV를 틀어놓고 멍하니 있어요. 무릎 나온 옷을 입고 편하게 누워 있어요. 얼굴에 뾰루지가 나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요.”

솔직하고 때론 엉뚱하지만, 작품 안에서는 자신을 지우고 인물이 되어버리는 김서형. 그러면서도 자신의 저력과 다양한 면모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였다. 그는 우리에게 반갑고 친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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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용호 기자 spjj@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