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나인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을 미리 봤다. 9명의 멤버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6명으로 줄어서 사실상 '식스뮤지스(Six Muses)'가 된 이 걸그룹의 데뷔 전후 1년을 따라다니며 찍은 작품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82분 내내 혼자 아는 비밀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대중음악계를 출입하며 보고 들어온, 그러나 사법적 사건이 되기 전에는 기사로 쓸 수 없었던 연예계 이야기들이 모자이크나 익명 처리 없이 담겼기 때문이다. 영화에 욕설이나 폭력은 없다. 실제로도 없어졌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연예기획사들의 후진적인 '스타 만들기 시스템'은 20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시스템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른바 'K팝 스타'의 99%가 나인뮤지스와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인뮤지스 초기 멤버 중 정말로 음악을 하고 싶어 한 사람은 류세라(27) 한 명뿐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 그녀는 성량이 다소 약한 듯하지만 음이 정확하고 노래의 맛을 제법 살릴 줄 안다. 그녀는 가수가 되려고 20㎏이나 감량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영화 속 장면처럼 나무젓가락을 입에 물고 '학교 종이 땡땡땡'부터 시작해야 하는, 다시 말해 결코 가수가 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기획사는 유일하게 노래 잘하는 류세라를 리더로 세우고 나머지 8명을 더해 '아홉 명의 여신(女神)들'을 만들어냈다. 다른 멤버들의 조건은 '키 크고 날씬하고 예쁘면서 가수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실제로 멤버 하나가 연락 두절을 이유로 잘려나가자 매니저는 모델 에이전시를 찾아가 그런 아이가 있느냐고 묻는다.
이들의 숙소에는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월요일은 '오전 11~12시 기초체력, 오후 12~1시 점심식사, 1~4시 안무, 4시~6시 30분 보컬, 6시 30분~7시 저녁식사, 7시~10시 30분 연기/안무'라고 쓰여 있었고, 이것은 금요일까지 대동소이했다. 토요일은 오후 1시부터 6시 30분까지 연습이었다. 기획사 사장은 "(그룹 하나 만들어내는 데) 짧게는 3년, 길면 7년 정도 걸리고 돈도 최대 10억원까지 든다"고 말한다.
'여신들'은 시도 때도 없이 "야! 너 이리 와봐" 식으로 깨진다. 그 상대는 사장부터 매니저, 코디네이터, 홍보담당까지 실로 다양하다. 모델 에이전시에 등록돼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걸그룹이 돼버린 이들 중 상당수는 가수에 별 뜻이 없어 보인다. 멤버들의 표정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하고 빨리 유명해지지 않지?' 하는 것 같다. 이들도 어김없이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래도 연습은 계속된다. 깁스처럼 팔과 어깨에 보호대를 두르고 안무 연습하는 장면은 우습고도 슬프다.
고생 끝에 데뷔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자 기획사는 이들을 군부대 위문공연에도 보내고 TV 프로 '체험 삶의 현장'에도 내보내며 안간힘을 쓴다. '체험 삶의 현장'에서 고구마를 캐던 멤버 하나는 "내가 지금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걸 모르니 반응이 신통치 않을 수밖에 없다.
예쁜 얼굴과 멋진 몸매는 어떤 직업을 택하든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쁘고 멋진 직업'을 택한다면 전혀 다른 얘기다. 무명 록밴드와 열광적인 소녀 팬, 아마추어 음악평론가의 이야기를 담은 캐머런 크로의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Almost Famous)'가 암시했듯이 연예계에서 '유명한' 것과 '유명해지기 직전인' 것은 박지성과 조기축구회원만큼 다르다.
이 다큐멘터리는 기획사와 연예인 지망생을 갑(甲)·을(乙) 관계로 그리지도 않고, 어느 한쪽을 피해자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연출자인 이학준 감독 말대로 "아이돌 산업이란 결국 아이들과 어른들의 서로 다른 욕망이 뒤엉킨 불구덩이"임을 보여줄 뿐이다.
세상에 '좋은 직업'이란 건 없다. 좋다고 하는 모든 직업에도 힘들고 괴로운 면이 있다. 다만 연예인이란 직업은 보이는 것이 너무 화려한 나머지 그 이면(裏面)이 달의 반대편처럼 항상 가려져 있다. 이것은 아이돌뿐 아니라 인디뮤지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인디뮤지션은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훨씬 더 자유롭다. 아무도 아무것도 지시하거나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정말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만 인디음악계에 남는다. 인디음악이 기획사 음악보다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
영화는 화장을 지워 주근깨가 그대로 드러난 류세라의 사진과 '세라는 결국 소속사를 떠났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그 장면이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에서 선글라스를 벗고 모로코로 떠나던 여주인공 페니 레인을 떠올리게 한다. 음악을 하고 싶지만 먼저 연예인이 되려고 했던 사람과 록밴드를 졸졸 따라다니는 팬에 불과했으나 스스로를 '보조 멤버'라고 속였던 사람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난다. 나쁜 선택을 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 선택에 머물러 있는 것이 잘못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