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은 붉게 물든다. 1년 전 이맘때만 해도 거리는 온통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여성들로 물결쳤다. 그런데 올가을 눈 시리게 뚜렷했던 빨간색은 가라앉았다. 대신 봄의 색 핑크와 여름 색 블루가 가을을 점령할 태세다.

익숙한 핑크와 블루는 아니다. 채도와 명도가 예년과 확연히 다르다. 탁한 핑크, 칙칙한 브라운, 멍 든 자줏빛, 지저분한 카키, 거무죽죽한 바이올렛, 창백한 블루…. "얼굴에 발갛게 단풍잎을 물들인다고 생각하면 돼요. 핵심은 눈과 입술에 이 어둡고 창백한 색깔들을 살짝 문질러 주는 거죠. 그러면 첫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강렬하진 않지만, 화장을 한 건지 원래 생기발랄한 얼굴인지 헷갈릴 만큼 자연스럽게 싱싱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어요." 맥(MAC) 수석 아티스트 변명숙 부장 얘기다.

본래 자줏빛보다 한 톤 어둡게 표현된 적갈색을 눈과 입술에 발라주면 그윽하고 이지적인 분위기가 난다. 색상은 투명하게 빛나고 질감은 잘 달라붙되 가벼운 걸 골라야 신경 안 쓴 듯 자연스럽다.

메이크업뿐 아니라 이번 시즌 파리·밀라노·뉴욕·런던 4대 패션위크 런웨이를 뒤덮은 의상 역시 대체로 어둡고 짙었다. 강진주 퍼스널이미지연구소 소장은 "경기가 안 좋으면 색깔이 탁해지고, 경기가 반등하는 순간 색깔이 선명해진다"면서 "탁하고 칙칙한 색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경기가 그만큼 안 좋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탁하고 흐릿한 화장이 오히려 얼굴에 광채와 생기를 더해준다. 변 본부장은 "화사하고 진한 핫핑크만 바르면 열여섯 꽃다운 청춘으로 돌아갈 것 같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나이 들수록 와인빛 립스틱을 촉촉하게 발라주면 성숙해 보이면서도 여리여리한 느낌이 난다"고 말했다. "인간의 피부는 새하얀 도화지가 아니니까요. 탁하고 칙칙한 색상은 얼굴에 화장을 한다기보다 붉은 기 살짝 도는 브라운으로 일종의 분위기를 드리워 주는 거예요. 그윽한 얼굴은 그 자체로 멋스럽죠." 강진주 소장도 "탁한 색상은 이지적이고 우아한 이미지가 더해지기 때문에 여성들이 발산하는 분위기도 세련되고 파워풀하다"고 말했다.

선명하게 화장한 얼굴을 맑은 물로 한 겹 씻어낸 듯한 느낌을 살리면 된다. 디지털카메라로 사진 찍을 때 선택하는 세피아(sepia·어두운 갈색의 흑백사진) 톤을 떠올리면 된다. 영국 메이크업 아티스트 테리 바버(Barber)는 "오래된 듯한 느낌을 기억하라. 세련된 옷에 어울리는 메이크업은 화장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탁한 핑크와 거무죽죽한 바이올렛은 젊어 보이는 색상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피부를 깨끗하게 표현해 줘야만 효과를 제대로 낼 수 있다. 파운데이션을 얼굴 전체에 얇게 펴 발라 준 다음 그보다 색이 한 단계 밝은 하이라이터로 눈두덩 중앙, 광대뼈 윗부분, 콧등, 관자놀이, 인중 등에 발라주면 윤기를 낼 수 있다.

눈과 입술은 붉은 물을 은은하게 들인다는 기분으로 꼭 필요한 제품만 골라 투명하게 발라주면 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립스틱 자체를 입술에 툭툭 두드린 다음 아래위 입술을 맞물려 주는 것이다. 아이섀도를 사면 공짜로 끼워주는 끝이 동그란 브러시에 립스틱을 발라 입술에 눌러주면 립스틱 전용 브러시로 발랐을 때보다 자연스러워 보인다. 입술선 안쪽을 색깔로 꽉 채우진 말 것. 립스틱이 덩어리째 뭉친 부분만 면봉으로 쓱쓱 펴주면, 발레 수업을 막 마치고 나온 소녀의 입술처럼 장미 꽃잎을 입에 가볍게 문 듯한 느낌이 난다.

아이섀도를 바를 때도 마찬가지. 브러시로 부드럽게 펴 바른 다음 눈 앞머리나 눈두덩 중앙에 반짝이는 골드 아이섀도를 슬쩍 덧발라 주면 눈이 한층 커 보인다. 한국인은 인상이 밋밋한 편이기 때문에 아이라이너와 마스카라를 꼭 해줘야 한다. 마스카라를 아끼지 말고 진하게 발라주면 깊고 풍성한 느낌을 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