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 수주 수주….'
처음엔 새가 지저귀는 줄 알았다. 지난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샤넬의 2014~2015 가을·겨울 오트쿠튀르 쇼. 금발의 서양 모델들 사이에서 그보다 더 노랗게 물들인 머리로 올 풀린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한국 출신 모델 수주(28·본명 박수주). 날고 긴다는 모델들의 집합소인 패션쇼 무대 뒤는 물론이고, 업계에서 한가락 한다는 패션 인사들이 모이는 데마다 '수주'라는 이름이 귀에 꽂혔다. 패션의 수도 파리에서 사람들 입에 쉼 없이 오르내린다는 건 그녀가 얼마나 '핫(hot)'한지 보여주는 증거. 지난 30일 '문화 샤넬(Culture CHANEL)'전에 참석하기 위해 모국을 찾은 그녀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만났다.
모델 데뷔 4년차이지만 행보가 심상치 않다. 뉴욕·파리·밀라노 컬렉션에서 톰 포드, 펜디, 랑방, 로에베 등 세계 정상급 패션쇼 무대에 섰다. 뉴욕매거진이 선정한 '올해 주목해야 할 모델 10'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6월 파리 캉봉가(街)의 코코 샤넬(1883~1971) 아파트에서 아이돌 그룹 빅뱅 멤버 지드래곤·태양과 샤넬 화보를 찍으면서 유명세를 치렀다. "신데렐라요? 오, 노(no)~! 바닥부터 시작했어요(웃음)."
그녀가 열 살 때 LA로 이민 간 부모는 딸이 좋은 대학 들어가 전문직 여성으로 살기 바랐다. 미 서부 명문 UC버클리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쇼핑하다가 모델 제안을 받았다. '안 될 거 뭐 있어?'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돌 지난 아기가 난생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모델 걸음걸이를 새로 익히고, 관련 책과 잡지를 탐독했다.
지금까지 세계무대에 진출한 동양인 모델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미지가 대부분 비슷하다. 치솟은 광대뼈, 까맣고 긴 머리, 작은 눈. 그녀는 먼저 거울부터 들여다봤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봤다.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큼직하게 꽉 들어차 있어서 동양인이 쉽게 소화하기 힘든 금빛으로 머리를 염색하면 색다른 매력을 낼 수 있을 듯했다. 판단은 들어맞았다.
지난해 샤넬 데뷔 이래 한 시즌도 빼놓지 않고 샤넬 쇼에 올랐다. 샤넬 광고도 도맡았다. 이번에 서울에 온 건 10월 5일까지 DDP에서 열리는 '문화 샤넬'전 홍보대사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전시 주제는 '장소의 정신'. 코코 샤넬이 한평생 발 디딘 곳 중에서 훗날 '디자이너 샤넬'에게 영감을 준 주요 장소를 골라 그녀가 미학적으로 영향받은 비잔틴·러시아 미술품, 책, 사진 등 500여점을 선보인다. "샤넬이 즐겨 쓴 소재 트위드(거칠고 성기게 짠 직물)와 저지(가볍고 잘 늘어나는 면 직물)는 바다에서 어부들이 입던 옷에서 실마리를 얻어 여성용 옷으로 재해석한 거죠. 샤넬을 상징하는 흰색과 검은색은 부모 없이 고아원에 맡겨진 어린 코코가 수녀들 차림에서 본 흑백 대비가 잔상처럼 새겨진 결과랍니다."
코코는 갔지만 지금 수주는 샤넬의 수석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게서 창조의 동력을 본다고 했다. "마음이 느슨해질 때 칼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어요. 24시간 일하는 게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여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