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국산차 광고는 1955년 말 조선일보에 실렸다. 그 유명한 '시발'차다. 발음이 조금 민망하게 들릴지 몰라도, '첫출발'을 뜻하는 '시발(始發)'이란 단어를 따서 지은 것이다. 당대엔 이름 좋다는 평도 들었다. 이 차가 탄생한 1955년이 이른바 '쌍팔년(단기 4288년)'이다. 전쟁의 상처를 아물리느라 어수선했던 시절인데도, 광고 속 사진에는 시발차 옆에 젊은 여성 모델까지 세웠다(조선일보 1955년 12월 1일자). 미군 지프 부품들을 활용하고 미군용 드럼통을 두드려 펴서 차체를 만들었다는 자동차지만, 엔진 실린더 헤드 등 상당수 주요 부품을 우리 기술로 깎아 만들었으니 국산차 1호라 부를 만하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차체 프레임, 헤드라이트, 타이어도 모두 국산이었다(경향신문 1955년 10월 1일자).
전쟁 포성(砲聲)이 멎은 지 2년 만에 우리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광고문 곳곳에 넘친다. '내무부·교통부·상공부 합동 시승회 때… "그만하면 훌륭합니다"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라고 자랑하며, '넓은 아세아에 있어서 자동차를 제작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넣어서 2개국뿐이오니… 반만년 문화민의 자부심을 가집시다'라고 썼다. 특히 이 차야말로 '외국인에게 자랑할 거리'라며 '(외국 손님 맞을 때) 위선 이 시발차를 타고 여의도 공항장에 나가십시오'라고 제안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1955년 12월 1일자). 1959년 경유를 쓰는 '시발 디젤'이 등장해 서울~인천 시승회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제작사 사장은 '가득 찬 감격'을 느꼈다고 광고했다(1959년 9월 9일자).
발매 초반 시발차의 인기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부유층 부인들은 이 차를 사려고 '시발 계(契)'까지 만들었다. 주로 택시로 쓰여 '시발택시'라 불렸다. 하지만 5·16 쿠데타 이후 시발택시 앞에 적신호가 켜졌다. 군사정권의 법률 개정에 따라 1962년 일본차 부품으로 조립한 신형 '새나라 택시'가 등장해 택시 손님을 모두 뺏기 시작한 것. '군사적' 외관을 가진 시발차를 군사정부가 찬밥 신세로 만든 셈이다. 사람들 입맛은 간사했다. 시발택시가 멋지다고 목에 힘주며 타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모두 안락하고 소음 적은 세단형 새나라 택시만 타려고 했다. 조선일보는 이를 두고 '구세대 식모'가 '요염한 양장(洋裝) 미인'에 밀려 '부엌살이도 용서받지 못하고 이 세상을 등졌다'고 했다(1963년 1월 16일자). 결국 시발차는 탄생 8년 만인 1963년 생산이 중단됐고 속속 폐차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역사적 자동차는 겨우 2000여대밖에 생산되지 못하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