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슬린 관장이 디자인에 반했다는 한국산‘삼족오 손목시계’를 크게 만든 모형을 들어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시계는 그저 아름다움을 위해 문양을 넣죠. 그런데 삼족오(三足烏·발 셋 달린 까마귀) 시계는 다양한 상징까지 집약돼 있어요.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는 세 다리, 이상을 향한 비상(飛上)을 뜻하는 세 날개도 그렇고요. 한국의 전통 문양은 대개 어떤 상징을 담고 있더군요. 그게 재밌고 신기해서 한국에서 시계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어요."

루드위그 외슬린(62·Ludwig Oechslin) 전(前) 스위스 라쇼드퐁(La Chaux-de-Fonds) 국제시계 박물관장이 한국에 왔다. 한국의 시계 브랜드인 트리젠코(TRIGENCO)의 기술 자문을 위해서다. 지난 4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시계박람회 '바젤월드'에 출품된 '삼족오 시계'에 흥미를 느낀 것이 방한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외슬린은 40년 가까이 시계 개발에 종사한 베테랑이다. 기계식 천문관측시계(별·달 등의 움직임을 관측해 경도·위도 등을 산출하는 기능을 가진 시계)의 대가로, 1989년 최초의 손목용 천체시계(해·별·달의 움직임, 일식·월식·일출·일몰 시간 등 천체 현상을 알려주는 시계)인 '아스트롤라비움 갈릴레오 갈릴레이'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입각해 시계를 만들 계획이라 했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시계에 살리기 위해 시계판을 단순화·최소화할 생각입니다. 동양화의 미는 절제와 여백에서 오잖아요. 도금처럼 소재를 변형하는 기교를 버리고, 시계의 본질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방향으로 갈 겁니다. 스위스의 시계 기술과 동양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접합시켜, 동서양의 조화를 시계에 구현하는 게 목표입니다."

외슬린은 "휴대폰의 등장으로 시계 산업이 저물어 간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먹는 음식이 곧 당신'이라고 했습니다. 시계도 마찬가지죠. (달의 움직임을 시계에 구현한) 문페이즈를 찬 사람은 지적으로 느껴지죠. 스포츠 시계를 즐겨 차면 활동적이라는 인상을 주고요. 어떤 기계가 시간 표시 기능을 가졌다고 해도 전통 시계의 역할을 대신하긴 어려워요."

외슬린은 "오히려 시계의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도 했다. "다이아몬드가 기능 때문에 비싼 보석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정교한 세공술이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이기에 가치를 인정받는 거죠. 시계도 고도의 기술과 첨단 디자인이 결합한 인류의 걸작입니다. 시계 기술과 디자인은 계속 발전하고 있으니, 가치도 계속 올라갈 겁니다. 실제로 세계의 시계 시장은 커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