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책은 어디로 가는가. 최근 출판 시장은 책 자체로 승부하지 않고 다른 장르에 종속되면서 다양성도 잃어가고 있다. 멀리 6000년 전부터 가까이는 500년 넘게 지식을 전승하며 문명을 떠받친 책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세계적 지명도를 가진 출판사들은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그들을 찾아가 출판의 길, 책의 미래를 물었다.

'불멸(不滅)'이라고 적힌 상자에 미술책을 넣어야 한다면 곰브리치(1909~ 2001)의 '서양미술사'가 먼저 떠오른다. 32개 언어로 번역돼 700만부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영국 출판사 파이돈(Phaidon)이 1950년 초판을 펴냈고 16번 개정판이 나왔다. 파이돈은 미술·건축·디자인 같은 시각예술 분야에서 명성을 쌓았고, 곰브리치는 죽을 때까지 이 출판사에서만 책을 냈다.

파이돈이 낸 책들. 아래부터 페란 아드리아가 쓴 요리책 ‘The Family Meal’, 알랭 드 보통이 쓴 ‘영혼의 미술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월페이퍼 시티가이드 ‘서울’.

여기까지가 파이돈의 과거. 요 몇 해 사이 파이돈은 요리책과 바람났다. 구글에서 검색하면 '곰브리치'가 아니라 '요리책(cookbook)'이 연관 단어로 뜬다. 스페인 레스토랑 엘 불리(El Bulli·미슐랭 별 3개) 주방장 페란 아드리아를 비롯해 당대 최고 셰프들이 파이돈에서 요리책을 내고 있다. 미술 전문 편집자들이 별안간 부엌으로 들이닥치더니 그 낯선 영토를 정복한 셈이다.

파이돈 출판사는 고속철도 유로 스타가프랑스를 향해 출발하는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지난 4일 사무실에서 만난 수석편집장 에밀리아 테라니(50·Terragni)는 "파이돈은 사람들이 탐내면서도 쓸모 있는 책을 만들어 왔다"며 "요리책 분야로 그 전문성을 넓힌 것"이라고 말했다. 서가에 32권짜리 '아트&아이디어' 시리즈, '서양미술사',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등이 지워지지 않을 지문(指紋)처럼 꽂혀 있었다.

―요리책이라니, 뜻밖이다.

"파이돈은 기존 요리책 시장의 결핍에 주목했다. 대체로 따분했고 디자인은 매력이 없었다. 파이돈이 만든 음식책은 미술 서적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독자가 그것을 알아봤고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새 분야에 진출할 때 전략은?

"요리책은 경쟁이 치열하다. 우리는 '꼭대기(최고)'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위험·고수익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엘불리의 주방장 아드리아는 사실 판촉 전화(cold call)로 처음 만났다."

에밀리아 테라니 수석편집장은 요리책에 대해 “음식이나 식당에 대한 책이 아니다. 셰프들의 마음가짐(attitude),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이라고 했다.

―판촉 전화라니?

"2006년이었다. 당시 파이돈 사장(현재는 미국 억만장자 레온 블랙으로 바뀌었다)이 일본에 스시 바를 열면서 주방장을 찾고 있었다. 아드리아는 그전까지 엘불리 밖에서 요리해본 적이 없고 요리책을 자가 출판해온 사람이었다. 제안에 그는 껄껄 웃더니 한번 만나자며 초대했다."

―음식에도 조예가 깊었나?

"미슐랭 식당은 가본 적도 없었다."

직원 114명의 파이돈은 해마다 신간 60종을 낸다. 올 하반기에 35종이 잡혀 있다. 런던 본사에 60명, 뉴욕에 25명이 일한다. 지난해 수입은 2500만파운드(약 436억원). 아시아 시장에 대해 묻자 테라니는 "아시아는 건축, 호주는 음식 분야에서 큰 수출 시장이다. 중국은 새롭게 떠오른 중요한 시장"이라고 했다.

―파이돈이라는 브랜드를 떠받치는 기둥이라면.

"콘텐츠와 디자인. 특히 디자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좋은 디자인은 책을 더 낫게, 더 읽기 쉽게, 더 섹시하게, 더 호감 가게 만든다. 읽고 싶게, 사고 싶게 만든다. 정상급 사진작가와 디자이너가 함께 작업했다."

―출판사가 만드는 책과 독자가 바라는 책 사이에 갭(균열)이 있지 않나?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 책을 발행하는 것은 끔찍한 종이 낭비고 에너지 낭비다.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책을 창조한다. 설령 독자가 그것을 아직 모를지라도."

―스마트폰이 독서의 적(敵)으로 지목된다. 출판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

"스마트폰은 적이 아니다. 독서가 들어갈 공간이 있다. 내가 작은 디바이스로 책을 읽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미래 세대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파이돈은 전자책과 앱 시장에도 본격 진출했다."

―한국 출판인에게 조언한다면.

"당대의 패션을 따라가지 마라. 좋은 책은 오랫동안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 불멸을 늘 생각하라."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묵힌 질문을 마지막에 던졌다. 책 표지마다 인쇄된 '파이돈(PHAIDON)'이라는 활자는 왜 그렇게 큰가. 답은 간명했다. "우리가 파이돈이니까(Because we are PHAIDON)." 자긍심이 묻어났다.

☞파이돈 출판사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창업했다. 소크라테스 덕에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 인물에서 출판사 이름을 따왔다. 여행가이드 시리즈도 내놓고 있다. 파리·뉴욕·서울·상파울루 등 대도시에 머물 때 어떤 건축(디자인)을 보고 뭘 먹으며 어디서 쇼핑하고 자야 할지 일러준다. 저작권 관리, 책의 통일성, 비용 절감 목적으로 홍콩 등 아시아 쪽에서 책을 찍어 배로 실어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