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신정근을 그냥 '신스틸러'라고 부르기에는 아쉽다. '신스틸러 위의 신스틸러'라고 부르면 모를까. 영화 '끝까지 간다'(김성훈 감독)에서 형사 반장 역을 맡은 그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고 친근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그가 스크린에 등장하면 웬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진다. 어떨 때는 주연배우보다 더. 이걸 대중이 배우에게 갖는 신뢰감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좋은 시나리오라 금세 마음이 갔지만, 처음에는 살짝 망설이기도 했단다. 그 이유는 '또 형사 반장이야?'라는 생각 때문. 이미 몇 차례 형사 반장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까지 간다' 속 반장이 영화 전체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외국영화 같다는 느낌이였어요. 애들이 계속 긴장감이 있겠구나, 했죠. 그러다 반장한테 오면 한 템포 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형사가 실제 그런 모습이냐고요? 주변에 계신 형사 지인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그걸 참고했죠. 실제로도 선배가 후배를 쪼기도 하고 감싸주기도 하고 그런데 사적인 영역에서는 격의가 없어요. 어린 형사 딸이 반장님한테 가서 "아저씨, 우리 아빠 때리지 말아요" 이러는 모습을 정말로 보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큰 사건이 터지면 또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긴장하죠. 목숨이 왔다갔다 하니까 그땐 군기도 바짝 들고요."
영화에서 고건수(이선균)를 휘어잡으면서도 끈끈한 '의리'를 보이는 신정근의 캐릭터는 그의 말 그대로 관객들에게 쉴 틈을 준다. 쉴새없이 몰아닥치는 긴장감 속에서 적절한 웃음포인트를, 그리고 나중에는 뭔가 찡한 뭉클함도 안긴다.
그가 형사 역에 유난히 잘 어울리는 이유는, 외모의 이유도 한 몫한다. 그는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하고 날렵한 몸을 자랑한다. 평소 운동을 즐긴다는 그는 "매일 등산하는 것을 이제는 일주일에 5번만 갈까 생각 중이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연극을 하다가 1997년 영화 '일팔일팔'로 데뷔한 후 쉼없이 달려온 그다. 지금까지 한 작품이 총 몇 편이냐고 묻자 "스물 몇개까진 알았는데, 그 다음부턴 모르겠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역사 쿨하다. 충무로의 거의 모든 시나리오가 들어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배우. 매일 시나리오 읽는 것도 아무리 직업이지만 힘들 것 같다고 하자 "아침에는 비교적 어렵지 않은 것을 보고, 산에 올라가 어려운 것들을 본다"라고 말했다. "산에 가서 책(시나리오)을 읽으면 굉장히 집중도가 높아지거든요. 산에 올라가서 대사를 읽는 것을 육지에 내려와서 하면 그대로 호흡이 남아요. 배우로서 엄청난 팁이라 후배들한테 알려주기도 해요. 알려준 대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전라남도 영광이 고향.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영화를 많이 봤던 그는 자연스럽게 배우를 꿈꾸게 됐고, 극단에 들어가 세월을 보내며 실력을 쌓았다. 그러다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당당히 한 타이틀을 장식하는 배우로 대중에 다가서게 됐다.
"신정근이라는 배우가 본격적으로 돋보인 것은 영화 '거북이 달린다' 때부터였던 것 같다"라고 말하자 그는 "맞다. 그 작품 이후에 개런티가 올랐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며 웃어보였다. 잠시 그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에 리딩 연습을 할 때는 그 역이 아니였어요. 나중에 그 배역이 왔죠. (뭔가 내 꺼 같다는 느낌이 있었나요?) 그런 것 보다 이런 느낌은 있었죠. 이 배역 하는 사람은 무조건 잘 되겠다...제 얘기라기 보다는, 영화라는 것이 조금 유명세를 탄 사람이 나온다고 해서 잘 되는 건 아니거든요. 정말 그 배역에 욕심있는 사람이 가는 게 좋아요."
수많은 작품,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신정근이지만 '멜로'는 단 한 번도 안 해봤단다. 스스로도 생각하면 좀 부담스럽다고. 그건 배우 개인의 취향의 문제다. 그래도 가장 많이 호흡한 여배우는 김선아다. 드라마 '시티홀', '여인의 향기', 영화 '더 파이브'에서까지 괴롭혔다. 김선아에 대해 그는 "연기를 잘 하잖아.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없고"라고 짧지만 강한 칭찬을 남겼다.
그가 꼽는 가능성 있는 선후배들도 궁금했다. "조달환은 뭐가 되도 될 놈이예요. 아무것도 안 하는 척 하면서 다 해요. 유해진의 폭발력은 말할 수 없이 대단해요. 조재윤은 너무나 깍듯하고 무엇보다 인성이 훌륭한 아이예요.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요? 평상시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다는 거죠."
'끝까지 간다' 현장에서 가장 '형님'이었던 그의 카리스마가 남성적인 비주얼처럼 대단할 것 같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록 KBS 2TV 예능프로그램 '해피투게어더3' 때의 모습이 생각났다. 재미있다. 무서울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따스한 정서를 풍기는 사람. 영화 속 정말 그 모습 같은 사람.
"어떤 후배가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형도 어려운 사람 있어요?' 아니 왜 저라고 있지, 없겠어요. 물론 기본적으로는 따스하게 대할라고 하는데 예의 없는 친구들한테는 눈이 반짝 거리죠."
본인이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장점이 뭐냐고 묻자 "모르겠네.."라는 대답과 함께 비교적 긴 시간이 지나갔다. 이어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멍청하지는 않은 거 같아요. 그리고 편안함을 주려고 노력하는데 상대방도 편안한 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하. 앞으로 어떻게 연기하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편안하게'인데, 그걸 폼 잡고 얘기한다면 깃털처럼 가볍게, 선비 도포자락처럼 펄럭펄럭이게요. 힘 주지 않고 하고 싶은 거죠."
또 그는 이야기한다. "한 때는 악역을 선한 사람처럼 연기 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이게 맞는 얘기인 줄은 모르겠지만 악역은 악역처럼 보이고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나쁜 것 같지는 않어요. 악역은 악역처럼 보이는 것도 멋있는 것 같아요."
최근 그는 한 동안 휴식기를 취했다. 스스로 리프레시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강우석 감독님이 회식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한국영화 주조연이 많지는 않은데 '네가 낭비가 되고 있다'라고요. 그 말씀에 굉장히 수긍이 가고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후 들어온 드라마 몇 개를 안했어요. 영화도. 이번에 쉬면서 모닥불 앞에서 생각을 해 봤어요. 앞으로 들어오면 차분히 하자고.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누군가 그랬잖아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 이런 생각을 갖게 해 주셨죠. 정말 따뜻한 충고였어요."
"배우에게 가장 최대의 적은 게으름"이라고 말하는 그는 꿈에 대해 "천천히 계속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하고, 책을 봐야 한다. 끊임없이. "'현상 유지'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거다"라고 말하는 그다. 자기 것만 충실하게 하는 배우가 사실 엄청나게 잘 하는 배우라고도 설명했다.
"예전에는 나이 먹으면 그레고리 팩 같은 그런 멋진 중년 배우가 되지 않을까, 라고도 생각했는데 전 전방아저씨, 딱 삼촌이죠.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해요.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데 트렌치 코트에 깃을 세우고 가면 정말 멋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저 깃을 꺾으면 뭐가 남아있을까, 라고요. 그 때는 내실이죠."
바로 다음 작품은 영화 '해적:바다로 간 산적'이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달리고, 게으름없이 끝까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