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초 새벽 3시 50분쯤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한 편의점에 강도가 들었다. 긴 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망치를 든 강도는 알고 보니 가출 청소년 이모(18)군. '여장 강도' 이군과 또 다른 가출 청소년 등 4명은 이날 편의점 종업원을 위협해 현금 50만원과 휴대전화를 빼앗은 후 편의점에 설치된 전화기를 망치로 부수고 달아났다. 한 시간 후인 오전 4시 50분쯤 이 편의점에서 500m 떨어진 또 다른 편의점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망치를 들고 다니며 편의점에 있는 전화기를 부쉈다는 점. 편의점 전화기에 자동 신고 시스템이 설치된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편의점 전화기엔 수화기를 들어 옆에 내려놓은 지 7초가 지나면 자동으로 112종합신고센터에 신고가 되는 '무다이얼링 시스템' 기능이 있다.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지 않아도 7초 후엔 자동으로 신고가 된다. 이를 아는 강도들은 종업원을 위협해 전화기 근처에 가지 못하게 하고, 아예 전화기를 부숴버리고 도망간다. 신고를 막거나 지연시켜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이다.
무선 비상벨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신고 방법이다. 편의점 직원들은 요즘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주머니 속 벨을 만지작거린다.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쓰는 벨과 똑같은 동그란 플라스틱 벨이다. 주머니에 이 벨을 넣고 있다가 버튼을 누르면 서울지방경찰청 112종합상황실에 자동으로 '긴급 상황' 신고가 된다. 서울 시내 5709개 편의점 중 394곳이 이 벨을 갖추고 있다.
무선 비상벨은 "강도가 칼을 들이대며 빤히 쳐다보는 상황에서 전화 수화기를 들고 7초를 기다리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편의점 종업원들의 의견에서 시작됐다. 무선 비상벨의 장점은 강도들이 거의 눈치채지 못한 상태에서 신고할 수 있다는 점. 기존 무다이얼링 시스템은 계산대로 이동할 수 없거나 흉기로 위협해 손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서울청 허명구 생활안전계장은 "실제 긴급 상황에서는 범인의 눈을 피해 전화기에 접근할 수 없어 신고를 못 하고, 잘못 놓인 수화기 때문에 오인 신고만 들어온다는 비판이 많았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비상벨은 무다이얼링 시스템처럼 전화기를 실수로 건드리는 바람에 신고가 돼 경찰이 헛수고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지난해 9월부터 6개월간 수화기가 7초 이상 내려져 '긴급 상황'으로 신고된 사례가 593건. 그중 83.6%인 496건이 수화기를 잘못 내려놓아 저절로 신고가 된 경우였다.
주머니 속의 무선 비상벨을 누르면 편의점 전화기에 연결된 작은 모뎀을 통해 서울청 112종합상황실에 '무선벨'이라는 표시와 함께 긴급 상황으로 신고된다. 벨을 누르고 나서 40초가량 현장 상황도 녹음돼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경찰은 편의점 종업원이 칼로 위협받는 상황인지, 성추행을 당하는 것인지, 폭행을 당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서울시는 무선 비상벨 기계 값 2만원을 지원한다. 하지만 통신비 월 4500원은 편의점이 부담해야 해서 일부 편의점에선 설치를 꺼리기 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