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웰스 감독의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August: Osage County)은 우리나라 TV의 이른바 '막장 드라마'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할리우드 명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어느 상처 투성이 가족의 풍경을 보여 주는 이 영화의 겉모습이 막장 드라마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가족끼리 서로 인상 쓰고 고함치고 싸우는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많습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엔 어떤 자제심도 없습니다. 가족 간 대화인데도 'F'자로 시작하는 영어 상소리들이 난무합니다. 코미디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더러 과장된 연기를 하며 거친 말을 내뱉지만, 이 영화는 코믹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진지한 가족드라마입니다. 분위기가 무겁고 어둡게 느껴집니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의 오리지널 포스터. 가장의 장례식을 계기로 모인 어느 가족 사이에 빚어지는 극심한 충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 배경은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외딴 구석인 오세이 카운티의 시골집. 섭씨 40도까지 치솟던 8월 어느날, 이 집의 가장이자 작가인 남자(샘 셰퍼드)가 자살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엄마 바이올렛(메릴 스트립)이 흩어져 살던 딸들을 부르면서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출발부터가 아픕니다.

오래간만에 모인 엄마와 세 딸, 그리고 사위, 손녀들은 장례를 치르고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가장의 장례식을 치른 사람들의 대화에서 떠난 분에 대한 추모의 느낌은 별로 찾기 어렵습니다. 아버지의 부음을 접한 딸이 한다는 소리가 "아빠가 엄마랑 너무 오래 사시더니 죽어 버렸어!"입니다.

사실 이 가족들 대부분의 삶은 썩 행복하지 못합니다. 모두들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 삽니다. 그 때문인지, 성격도 모난 편입니다. 엄마 바이올렛은 구강암 투병 중인 환자입니다. 항암 치료를 위해 머리를 삭발했습니다. 이런 약 저런 약을 너무 먹다가 약물 중독에 걸려 종일 횡설수설합니다. 원래 독설가인 그녀는 약에 절어 딸들 가슴에 비수처럼 꽂힐 말만 골라서 쏘아댑니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서 가장의 자살 소식을 듣고 한데 모여 장례를 치른 가족의 식사 장면. 모처럼 한 식탁에 마주 앉았지만 가시돋친 말들을 주고받던 가족들은 이내 서로를 물고 뜯고 할퀸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대부분 순탄하지 않다. 이 집안 둘째 딸 아이비(줄리엔 니컬슨, 오른쪽)는 이종사촌인 찰스(베네딕트 컴버배치, 왼쪽)를 사랑해 힘겹다.


딸들은 또 어떻습니까. 큰딸 바바라 웨스턴(줄리아 로버츠)은 남편 빌 포드햄(이완 맥그리거)이 젊은 여성과 바람피우자 별거 중입니다. 이혼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 부부는 아빠의 초상집에 와서도 옥신각신 다툽니다. 바바라 부부의 13살난 딸 진(애비게일 브레스린)은 벌써 담배를 꽤 즐깁니다. 둘째딸 아이비(줄리엔 니컬슨)는 하필이면 이종사촌인 찰스 아이켄(베네딕트 컴버배치)을 사랑해서 앞으로 헤쳐야 할 길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셋째 딸 캐런(줄리엣 루이스)은 결혼에 여러 차례 실패했는데, 이번에 함께 온 약혼자 스티브(더못 멀로니)는 여자를 너무 밝히는 바람둥이 타입입니다. 스티브는 약혼녀 언니의 딸인 13살 진에게 치근덕대다가 들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기까지 합니다.

이 가족의 회합은 서로가 서로를 할퀴는 난장판이 되어 갑니다.감정이 격해지자 위 아래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붓습니다. 격돌은 말싸움을 넘어 '머리끄댕이' 붙잡는 육박전의 초반까지 갑니다. 바이올렛과 딸 바바라가 방 바닥을 뒹굴며 벌이는 모녀 육탄전은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을 만합니다. 가족 내부에서 오랜 세월 숨겨왔던 출생의 비밀 하나도 드러납니다. 그야말로 막장드라마가 갖출 건 다 갖췄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음미해 보면 TV의 막장 드라마와는 겉모습만 비슷할 뿐 격이 다른 이야기임을 알게 됩니다. 욕설과 고함이 수시로 난무하지만, '수십년 전 살인의 비밀'이나 '아기가 뒤바뀐 사건'처럼 판에 박힌 황당한 설정을 우려먹으며 오로지 재미를 위해 비현실적 갈등을 과장하는 막장드라마 속 갈등과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속의 갈등은 다릅니다. 영화에서 엄마와 딸들이 치고받고 다투고 막말을 하는 상황들이란 사실 우리들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큰딸의 충돌이 가장 진한 기억을 남깁니다. 엄마 바이올렛은 혀 꼬인 발음으로 큰딸에게 "부모 고마움도 모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년! 우리는 시골에 처박혀 외롭게 살았는데…"라고 독설을 퍼붓습니다. 큰딸 바바라는 약물에 중독돼 휘청거리는 엄마에게 분통이 터져 "생선 먹으란 말야 이 년아!"라고 극언을 뱉어냅니다. 독설가 엄마와 다혈질 딸의 못말리는 충돌이지만, 왜 이들이 그런 말을 토해냈는지 이해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영화엔 막장 드라마에 없는 게 또 있습니다.명배우들의 명연기입니다. 메릴 스트립, 줄리아 로버츠, 줄리엣 루이스, 이완 맥그리거 등 배우들 하나하나도 절정의 기량을 보여 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의 하머니도 빼어납니다. 영화 첫머리에 잠깐만 나오기는 하지만 엄마 바이올렛의 남편인 작가 역을 맡은 샘 셰퍼드는 실제로 글도 쓰고 연기도 한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예술가의 향기를 느끼게 합니다.

전혀 행복하지 못한 이 가족들이 서로 지지고 볶고 다투는 이야기가, 멋지고 행복한 사람들의 화려한 드라마보다 우리 마음을 더 어루만져 줍니다. 인물들의 거침없는 감정 표현과 격렬한 말 속엔 우리들 모습을 거울에 비춰낸 듯한 현실감이 있습니다. 누구나 멋지게 잘 살아 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언제나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사의 고단함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할 말, 못할 말 다 해 버리는 가족이, 겉으로만 화목한 가정보다 훨씬 소통이 활발한 가족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