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 유엔 한국재건위원회에서 온 인도 대표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겠는가'라고 말했어요. 한 나라 대통령이 비행기 탈 돈이 없어 서독 정부에 항공편을 요청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을 보면 그 인도인이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백영훈(84)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은 국가 유학생으로 서독 에를랑겐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독일 박사 1호'다. 50년간 경제학자·공무원·정치인으로 활동한 그가 최근 우리 근대화의 뒷이야기를 담은 '조국 근대화의 언덕에서'라는 책을 냈다.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던 백 원장은 1961년 서독에 파견되는 차관(借款) 교섭단에 통역관으로 동행한 것이 계기가 돼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 때 통역보좌관으로 수행했다.
"당시 한국은 최빈국이었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우르르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니 누가 만나주겠어요? 서독 경제장관 에르하르트와 같은 대학 출신인 은사(恩師)를 찾아가 '다리 좀 놓아달라'고 매일 읍소해 겨우 약속을 잡았어요."
그렇게 얻은 상업차관 3000만달러는 우리 외환 보유고의 5분의 1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지급보증을 해줄 은행은 없었다. 어렵게 따낸 차관이 물거품 될 위기였다. 당시 서독 정부 노동부 과장이던 대학 동기가 "서독에서 일할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주면 그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빌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백 원장은 "나중에 그들이 보내온 돈이 우리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했고 그게 경제 발전의 종잣돈이 됐다"고 했다.
백 원장은 1967년 국내 최초의 민간 연구소인 한국산업개발연구원을 열었다. 고속도로, 울산·구미공단 건설 등 국부(國富)를 쌓는 정책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 경제자문으로 활동했고, 국회의원도 지냈다. 2002년에는 한·독 경협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백 원장은 "조국이 발전할 방향을 일러주는 것이 학자의 역할"이라며 "내가 직업은 다양했지만 '정체'는 항상 학자였다"고 했다. 이어 "21세기는 '팍스 아시아나'의 시대고, 그 선두에 서야 할 것이 통일한국"이라고 했다.
"50년 전 '내 자식은 배곯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광부 8000명, 간호사 1만명이 독일행 비행기를 탔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앞선 세대가 흘린 땀의 역사를 알고 개척 정신을 가져주세요. 그게 통일을 앞당기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