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25)이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숙여 인사했을 때, 여중생의 일기장 한구석을 몰래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얀 피부에 선 고운 얼굴, 순정만화 주인공에게 어울릴 법한 금발까지. 조숙한 여중생들은 딱 이종석 같은 소년을 일기장에 그리며 공상에 빠지곤 한다. 지난해 TV 드라마 '학교 2013'과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성공 이후, 이종석은 10대부터 애 엄마까지 여자들 공상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가 22일 개봉하는 '피끓는 청춘(감독 이연우)'에서 1982년 충남의 한 농고 제일의 카사노바인 중길을 연기한다. 중길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나 영화 '노브레싱'에서처럼 잘난 구석이 있지는 않지만, 고교생 주제에 "너처럼 팔꿈치가 하얀 여자는 처음 본다"는 말을(충청도 사투리로) 건네는 남자다. 순정만화보다는 개그에 더 가깝다.

이종석이 연기해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는 모두 교복을 입고 있다. 그는“교복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보여준 것 같다. 이젠 교복 벗고 악역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팬티 바람으로 노래를 부르고, 학교 '짱'에게 굽실거리는 모습에 놀라는 팬들도 있을 것 같다.

"아, 그 장면 진짜 창피했다! 그때 속옷이 너무 하 다. 살이 비칠까 봐 두 겹이나 입었다. 시나리오를 공부하면서 머리 정리를 하는 작은 손동작까지 다 준비했다. 더 망가지려고 애썼는데, 과하다 싶은 연기는 다 잘렸더라."

―여자 대하는 연기가 자연스럽다.

"실제로는 소심한 편이다. 학교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는 아이였고 아는 여학생도 없었다. 지금도 취미나 특기가 없고 친구도 별로 없다. 남자친구로서도 별로다. 듬직하지 못하고 옆에 있는 사람한테 의지하면서 내 약한 모습을 감추려고 한다. 얼마 전 TV에 나갔을 때도 땀을 한 바가지나 흘릴 만큼 긴장이 돼 옆에 있는 박보영한테 계속 엉겨 붙었다. 아직도 아이인 것 같다."

대개 20대 남자배우들은 인터뷰할 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못한다. 이종석은 줄곧 앞사람 눈을 보고 말했다. 자신을 가리켜 소심하다든가 '아이'라고 표현한 사람치곤 대답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머리 색은 그냥 바꾼 것"이라고 했다.

―다음 배역 때문에 머리를 염색한 게 아닌가?

"아니다. 쉴 생각을 하면서 염색한 것이다. 소속사에 대한 반항이랄까, 흐흐. 지난해 '너목들'과 '노브레싱'을 동시에 촬영하고 활동이 많아서 힘들었다."

―지난 3년 내내 대중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드라마와 영화에 끊임없이 등장했다. 겹치기 출연까지 한 이유는 뭔가? (그는 작년 영화 '관상'과 'R2B'에도 출연했다)

"열아홉 살부터 스물한 살까지, 소속사에서 3년간 아무것도 안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 못한 거다. 데뷔(드라마 '검사 프린세스')만 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캐스팅도 잘될 줄 알았는데,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이 여러모로 지원을 해줬기 때문에 아르바이트할 필요는 없었는데, 나중엔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바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피끓는 청춘’의 한 장면.

―그래서 욕심이 많다는 건가?

"'모델하면 연기자 할 수 있다, 아이돌 가수하면 연기자 할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하기 싫은 일에 끌려 다닌 시절도 있었다. 연기를 하지 못했던 갈증이 터져 나온 것 같다. 목이 너무 마르니까 입에다 막 물을 들이부었던 것이다."

―그 덕에 팬이 많이 늘었다. 남자 팬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내 이미지가 갖는 한계를 안다. 흐리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밋밋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하얗고 선이 가느다란 느낌도 있고. 내가 봐도 아이돌스러운 얼굴이다. 디캐프리오가 어렸을 적에 했던 고민이 이해가 간다. 나한테도 그런 시간이 올 것 같다."

―남자다움에 대한 고민인가, 연기에 대한 고민인가?

"아직은 '배우 이종석입니다'라고 인사하는 게 부끄럽다. 스스로 만족할만한 연기를 못 하니까. 20대 배우가 연기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 같아서 빨리 나이 들기를 바란다. 몸이 좋은 남자배우들이 듬직하고 남자다워 보이는 게 부럽기도 하다. 그런데 난 운동하는 것도 싫어한다. 살찌우려고 많이 먹으면 배만 나온다."

―하지만 대세는 '몸이 좋은 남자배우'들이 아니라 '이종석'이다.

"대세라는 건 지나가는 거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TV 보는 것을 좋아해서 연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TV에 나오는 내가 좋고, 연기 말고는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대세를 빼고, '배우'라고 불릴 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