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오후 2시쯤 일본 오사카(大阪) 난바(難波)역 근처에 위치한 일본의 산업기계 제조업체 '구보타' 본사. 연 매출 1조2000억엔(약 12조원)에 전 세계 52개국 지사를 둔 글로벌 기업 구보타는 올해로 창업 124주년을 맞았다. 이날 본사 회의실에서는 인사팀과 홍보팀 소속 직원 6명의 '2014년 스케줄 회의'가 한창이었다. 먼저 눈길이 간 것은 이들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구보타는 철관 등 산업 자재나 농기계를 주로 만드는 기업이지만, 여성 사원이 989명으로, 전체(9855명)의 10%가 넘는다. 사무직뿐만 아니라 건설회사 바이어를 상대하는 영업직, 현장에서 직접 기계를 다루고 테스트하는 기술직 여성도 상당수다. 구보타 인사부의 히로세 후미에 실장은 "2013 신입 사원 150명 가운데 30명 이상이 여성"이라며 "여성 비율이 해마다 높아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회사의 여성 친화 정책 덕분"이라고 말했다.

구보타의 육아휴직 기간은 최대 2년으로, 휴직 기간이 끝나도 자녀가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칠 때까지 두 시간씩 단축 근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현재 단축 근무를 하는 여성 사원만 95명이다.

일본 정부가 저출산과 고령화 대책의 핵심을‘여성’으로 보고, 여성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19일 일본 오사카에 있는 여성 친화 기업‘구보타’본사 회의실에서 여직원들이 신년 스케줄을 의논하는 모습.

출산, 육아, 남편 전근 등으로 회사를 그만둔 옛 여성 사원들을 위한 재고용 정책도 있다. 매년 신청자 20명 가운데 면접을 통과한 3∼4명이 구보타에 재입사한다.

이 같은 여성 고용 정책에는 마스모토 야스오(益本康男) 회장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마스모토 회장은 한때 여성 사원 5명 중 3명꼴로 출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노동의 한 축인 여성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없는 회사라면 그 회사의 미래는 없다.'

그는 2009년부터 '다양성 관리(Diversity management)'를 모토로 내걸고 "여성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남녀 전 사원이 의식을 개혁하자"고 주문했다. 여성 사원들이 자기 경력을 어떻게 개발할지 고민해볼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강의도 6개월에 한 번씩 열었다.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남성들이 여성의 출산·육아 문제를 배려하기 시작했고, 이에 여성 사원의 의욕이 향상되면서 팀워크도 좋아졌다. 이는 회사 전체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고, 여성 사원들은 나아진 환경 속에서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현재 구보타의 과장급 이상 관리직 여성은 약 15명으로, 최근 5년 새 4배가량 늘었다.

구보타의 여성 고용은 최근 일본 사회에 불고 있는 고용 시장의 변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추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달 "2014년 6월 발표할 신(新)성장 전략을 통해 여성 인력의 잠재력을 끌어내겠다"고 공표했다. 앞서 작년 9월에는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를 통해 "일본에서 가장 활용도 낮은 자원이 여성 인력"이라며 "아베노믹스(아베 총리의 경제정책)의 핵심이 바로 우머노믹스(Womanomics)"라고 강조했다. 여성이 주도하는 경제·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의 이 같은 '여성 고용' 강조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다. 2011년 기준으로 일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3.0%로, 미국(67.8%), 유럽연합(EU·66.5%) 등보다 낮다. 또 일본 여성의 70%는 첫아이 출산 후 일을 그만두고, 학위를 소지한 일본 여성 중 74%가 자발적으로 사직한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 총인구 및 경제활동인구(15~64세) 전망.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

2012년 10월 일본을 찾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일본의 낮은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을 지적하며 "여성이 일본을 구할지 모른다"는 뼈 있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뜸해지면서 일본은 자연히 여성이 가장 출세하기 어려운 나라가 됐다. 미국의 기업 지배 구조 분석기관 GMI레이팅스에 따르면 2013년 3월 말 현재 일본 기업에서 여성 임원 비율은 1.1%로, 조사 대상 45개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초부터 '일·가정 양립 지원'이라는 이름하에 여성 고용을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긴 노동시간, 남성 중심 문화, 여성 고용에 대한 미흡한 사회적 인식 때문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임금·승진 등에서 남성들보다 차별받는다는 인식 때문에 여성의 자발적 실업도 높은 편이다.

이런 가운데 2012년 말 출범한 아베 정권이 저출산 고령화 대책의 핵심을 '여성'으로 잡고,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일본의 부족한 노동력을 여성 인력으로 극복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미 지난해 '여성 공공 일자리 20만개 확충' '2020년까지 정부·기업 여성 리더 30%로 증대' 등의 구상을 내놨다.

또 경제 3단체 간부들을 관저로 불러 모든 상장기업의 임원 중 최소 1명을 여성으로 기용해줄 것과, 육아휴직 기간을 3년으로 연장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정부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각 기업의 여성 고용정책에도 서서히 파급되면서 대내외 기대치도 높아지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일본의 여성 취업률을 남성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노동인구가 800만명 늘고, GDP가 14%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다.


공동 기획: 여성가족부, BAIN &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