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J R R 톨킨(1892~1973)의 ‘반지의 제왕’이 전적으로 대영제국 영연방 영향하의 영어권 문학을 기준으로 ‘세계3대 판타지’라는 이유 때문에 영화화된 프리퀄 ‘호빗’ 시리즈에까지 애써 후한 점수를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톨킨의 첫 작품 ‘호빗’(1937)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아동용이다.

2001~2003년 3년에 걸쳐 개봉한 3부작 ‘반지의 제왕’은 새 밀레니엄 초반 당시로서는 굉장한 영상혁명이었다. 호빗(소인족), 엘프(요정), 오크(괴물), 골룸 등 상상속 중간계의 등장인물과 종족들의 이름이 국내에서도 일상적인 비유어가 될 정도로 세계적 히트를 쳤다. 아카데미를 석권했을 뿐 아니라 각 편은 각각 9300만~94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전세계에서 각각 8억~11억 달러의 상영 소득을 얻었다.

유럽의 신화와 전설, 특히 핀란드,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의 영향을 받은 ‘반지의 제왕’ 3부작이 영화화된다는 것만으로도 서구세계가 들썩일 만 했고 촬영배경이 된 뉴질랜드 관광영화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뉴질랜드 출신 피터 잭슨(52) 감독은 훈장과 기사작위를 받았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과거 이야기를 다룬 후속편이 9년 만에 선보이게 된 것은 크나큰 성공에 따른 불화와 잡음이 따랐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큰 주제 중 하나가 탐욕에 대한 경고였음에도 실제에선 그런 교훈을 전혀 따르지 못했다. 2005년 3월 피터 잭슨은 제작사인 뉴라인에 게임 부가산업에 대한 소득을 받지 못했다며 소송을 걸었고, 뉴라인의 공동창업자 로버트 셰이(74)는 “탐욕스런 잭슨에게 ‘호빗’의 감독을 맡기지 못하겠다”고 하다가 사과하는 등의 소동을 벌였다. 2008년 2월에는 JRR 톨킨의 아들인 크리스토퍼 톨킨(89) 등이 집행하는 톨킨 재단과 하퍼 콜린스 출판사가 뉴라인에 ‘반지의 제왕’ 3부작에 대한 계약불이행과 사기로 2억2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 시리즈가 전세계에서 60억 달러를 벌어들이고도 선금조로 6만2500 달러밖에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소송이 2009년 9월 종료되며 영화 ‘호빗’이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톨킨 신탁의 2009년 회계에 따르면 영화화에 대한 권리의 대가로 최소 380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잭슨이 전작들보다 못하다고 비교되는 것이 싫다며 감독직을 고사하기도 했었고, ‘판의 미로’ 등 판타지에 주력해온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49)가 잭슨 감독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이 프로젝트에 끼어들었다가 의견차로 인해 결국 빠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편 감독 피터 잭슨이 ‘호빗’ 시리즈의 메가폰을 다시금 홀로 잡았다.

이 시리즈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톨킨 판타지의 핵심인 ‘반지의 제왕’의 트릴로지 ‘반지원정대’, ‘두개의 탑’, ‘왕의 귀환’이 3부작으로 완료됐는데, 본격 테마를 위한 백그라운드를 담은 초창기 소설 ‘호빗’과 ‘반지의 제왕’ 부록에 담긴 조각난 이야기들로 또다시 3부작을 만들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3부작을 완결성 있는 서사구조로 보는 서구 전통에 따른 ‘트릴로지(trilogy) 강박증’이라도 걸리지 않은 이상 이 내용을 어찌 3편으로 늘여 우려먹을 생각을 했는지 통탄스럽다.

내용은 한 줄 요약이 가능하다. 호빗 빌보 배긴스(마틴 프리먼)와 회색 마법사 간달프(이언 맥켈런), 난쟁이족 왕의 후예 소린(리처드 아미티지)이 이끄는 13명의 난쟁이들이 사나운 용 스마우그가 빼앗아간 동쪽의 ‘외로운 산’ 에레보르 왕국을 되찾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여러 모험들을 겪는다는 얘기다.

솔직히 번외편이나 외전 정도의 역할로 한 편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 스토리를 늘이고 늘이다보니, ‘호빗: 뜻밖의 여정’(2012, 이하 ‘호빗1’)에 이어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이하 ‘호빗2’)까지도 ‘기나긴 예고편’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불평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나마 ‘호빗’은 당초 두 편으로 만들어질 계획이었는데, 잭슨 감독의 주장으로 2012년 7월 마침내 3편 ‘호빗: 또다른 시작’(2014, 이하 ‘호빗3’)까지 제작하기로 했다. 2편은 더 느슨해지며 여전히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장장 169분의 러닝타임을 지닌 ‘호빗1’이 악당 역할인 용 스마우그(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눈뜨는 것으로 끝나는 것에 허무함을 느꼈다면, 역시 164분나 되는 ‘호빗2’가 스마우그가 ‘드디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에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3편은 빌보가 고향 호빗튼으로 돌아오는 얘기를 다룬다는 데 대체 광고문구로 내건 ‘전쟁은 지금부터다!’에서의 전쟁은 언제 나오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에는 신선하고 경이로웠던 CG로 만든 판타지 세계가 10여년이 지난 현재로서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너도나도 CG범벅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 영화제작에 만 집중하면서 재능 넘치는 감독들이 떠나고 있는 판이다. 관련자들은 ‘호빗1’의 제작비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대략 2억~3억1500만 달러를 들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벌어들인 상영수익은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에 미치지 못한다. 10여년간의 물가상승률까지 고려해보면 절대 예측보다 잘 된 장사는 아니다.

톨킨이 중세이후 서구문화의 바탕이 된 기독교와 자신이 전공한 앵글로색슨과 북유럽 서사시의 영웅들을 원작에 담았듯이, 제작진은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전설을 참조해 이들 판타지 모험담의 원형에 비견되는 시대극적인 품격을 원했음이 분명하다. 서구 고전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자기만족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분장과 CG를 비롯, 힘든 야외 로케이션 촬영, 오랜 캐스팅 작업을 거쳐 뽑은 배우들의 출연분량 배려 등 제작진의 노고야 이루다 말로 할 수 없겠지만, ‘호빗’을 타이틀로 내걸고 호빗이 주인공도 아닐 뿐더러 대체 절제가 없다. 타성에 젖은 피터 잭슨 감독의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야기 구조는 트로이 전쟁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10년간에 걸쳐 귀향을 하며 겪으며 온갖 기괴한 생물체, 괴물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여정을 다룬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다를 바 없다. ‘호빗1’에서 주인공 빌보가 골룸과 벌이는 수수께끼 대결은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가 사람의 얼굴에 사자의 몸을 한 괴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에피소드와 겹쳐진다. 오이디푸스는 ‘퉁퉁 부은 발’이라는 뜻인데 호빗족 빌보가 커다란 발을 하고 있는 것도 왠지 닮아있다. 절대반지를 끼면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솔로몬왕의 반지’ 전설에서 빌려왔다.

하지만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쓰여진 기원전 700년경과 21세기 인간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엄청나게 다르다. 지금과 같은 과학적 지식은커녕, 이동수단이 도보와 말, 배 정도밖에 없던 시절 자신이 사는 마을 밖 세계는 신비와 동시에 공포로 다가왔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무지는 무한한 상상력의 보루가 됐다. 하지만 온갖 신화적 상상물들과 괴생명체의 존재가 지구상에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된 현대에 와 이러한 신화와 전설은 전공자들 외에는 아이들에게나 통하는 ‘베드타임 스토리’가 됐다. 꿈나라로 들어가도록 잠이 솔솔 오는 그런 얘기 말이다.

어려서부터 톨킨의 작품에 익숙해진 영미권 관객이라면 모를까, 등장인물이 하도 많아 이들의 퍼레이드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하다. ‘호빗’에 환장해 가계도와 인물관계도를 꿰고 있는 마니아가 아니라면, 웬만치 눈이 밝지 않고서야 반수 이상 무명의 뉴질랜드 배우들로 채워진 13명의 난쟁이족들을 구분하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늙은 마술사 간달프(이언 맥켈런), 평범한 중년 호빗 빌보, 먹성 좋고 지저분한 떠돌이들인 한 떼의 난쟁이족들만이 줄창 나오는데 아무래도 매력과 흡인력이 떨어진다. 그나마 엘프 역으로 오디션을 봤던 에이던 터너(30)에게 뜬금없이 난쟁이 킬리 역을 맡기며 비주얼을 강화해보려 하는데, 180㎝나 되는 키를 ‘슬레이브 모션 컨트롤’이라는 카메라 기술과 트릭으로 작게 보이려 하는게 리얼리티만 깎아먹는다. 소린 역의 리처드 아미티지의 실제 키도 189㎝로, 타 종족과 함께 등장했을 때만 ‘비교법’으로 키를 줄이는 것이 영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미 핍진성(그럴듯함, 있음직함)을 잃은 여러 생물, 괴물 캐릭터 열전과 익숙하지 않은 여러 지명들은 졸음을 야기한다. 이들 원정대를 위협하는 베오른, 대형 거미, 오크, 와르그, 트롤, 용 등이 줄줄이 등장하는데, 관성적으로 엇비슷하게 반복되는 탈출 에피소드는 너무 뻔해서 질린다. 본격적인 얘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어찌됐든 다들 살아남을 것이 뻔하지 않은가. 이들의 전투와 액션신도 새로울 것은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69)의 ‘인디아나 존스’식의 액션 장면을 좀 흉내 내다 마는 정도다.

이를 의식이라도 한 듯 타우리엘(에번젤린 릴리)이라는 원작에 없는 여자 요정 캐릭터를 선보이지만 별 효과는 없다. 타우리엘은 요정 왕자 레골라스(올랜도 블룸)의 사랑을 받는 동시에 난쟁이족 킬리에게 매력을 느끼기도 하는 전사 요정인데, 그렇다고 이 심심한 이야기에 인상 깊은 로맨스를 더하는 것도 아니다.

‘호빗1’에 이어 2편도 초당 48프레임을 찍을 수 있는 초고속프레임(HFR) 최첨단 ‘레드 에픽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해 3D로 촬영됐다는데 이것도 문제다. 적절한 관람 각도를 잡은 후 부동자세를 유지하지 않는 한 초점이 잘 맞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자막이 흔들리며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고질적이다. 국내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영화관 중 한 곳인 CGV왕십리에서 감상했는데도 그렇다. 극장 직원은 “정중앙 쪽에서 보지 않는 한 현재의 3D기술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는 답을 내놨다.

한편 12일 개봉하기로 한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서울 시내 대부분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는 접하기 어렵게 됐다. 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코리아와 극장체인들이 수익배분비율인 부율문제로 다툼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CJ CGV와 롯데시네마 등은 “워너브러더스코리아가 서울 지역에만 유독 높게 책정되어 온 외국영화의 배급료를 관철시키기 위해 개봉 직전 서울 지역 일부 극장에 배급 거절을 통보했다”는 공지를 내걸었다.

이에 맞서 워너브러더스코리아는 자사 페이스북에 “통상적으로 적용되던 종전 배급조건의 변경을 시도한 적이 없고, CJ CGV와 롯데시네마가 제시한 배급조건에 합의를 이룰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다”며 “CJ CGV와 롯데시네마가 상영을 취소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전쟁은 영화 속이 아니라 실제에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