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 살아서 곁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아들의 영정을 어루만지던 아버지는 결국 소리 높여 울었다. 군복을 입은 영정 속 아들은 늠름했다. 영정 아래에는 지난 4월 정부가 수여한 옥조근정훈장과 훈장증이 놓여 있었다. "군대 가서 찍은 사진이니까 아들이 스물한 살 때예요. 건강한 모습은 이 사진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갔군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6년 6월 시위 학생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쓰러져 투병하던 의경 출신 김인원(37)씨가 15일 오전 4시 17분 패혈증 악화로 전남대병원에서 숨졌다. 의식을 잃은 채 병원 침대에 누운 지 17년 5개월 만이다. 아들의 손발이 돼 준 아버지 김정평(68)씨와 어머니 김복임(64)씨는 광주보훈병원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으며 "이제 우리는 희망을 잃었다"며 오열했다. 장례식장을 찾은 100여명의 경찰,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 대원 10여명이 찾아와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 김정평씨는 "17년 전 종북세력 앞잡이의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맞고 아들이 쓰러졌다. 암 조직 같은 종북세력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데, 그 싹을 자르지 않으면 '제2의 김인원'은 또 나올 것"이라고 했다.
김인원씨는 여수대 해양생산학과 1학년을 마치고 1996년 1월 의경에 자원입대했다. 그해 6월 14일 조선대에서 열린 '조선대 총학생회와 북한 김형직 사범대학 자매결연식' 현장에 전남경찰청 기동 9중대 3소대 소속으로 출동했다. 돌과 화염병, 쇠파이프가 난무하던 중 김씨는 왼쪽 다리에 화염병을 맞았고, 뒤이어 누군가의 쇠파이프에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다.
여수가 고향인 아버지는 평일 여수의 시장을 돌며 굴·바지락·전복·홍합·뱀장어 등을 사 삶은 뒤 쌀가루·콩과 함께 갈아 아들의 코와 위를 연결한 관을 통해 먹였다. 부부는 이 일을 17년간 반복했지만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됐다.
1993년 시인으로 등단한 아버지는 2004년 대학 행정직을 정년퇴직했다. 네 권의 시집을 냈는데, 두 번째와 네 번째 시집엔 아들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담았다. 그는 "인원이가 없으니 앞으로는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경의 경우 지난 9월 25일 마지막 기수가 모두 제대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42년간 322명이 순직했다. 의경은 2008년부터 올해 8월까지 공무 중 부상(찰과상 등 가벼운 부상 제외)으로 처리된 경우만 249명에 달한다. 시위 진압 중 순직한 사건으로는 1989년 5월 발생한 부산 동의대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시위 학생들은 사복경찰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다 화염병을 던졌고, 큰 화재로 번지는 바람에 전경 3명 등 경찰관 7명이 사망했다. 2001년 6월엔 울산에서 민주노총의 시위를 진압하던 전경 이병철(35)씨가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왼쪽 눈을 실명(失明)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