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도자작가 10만명을 키워야 합니다.” 조선시대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떠올리게 하는 ‘버금이 작가 10만 양병설’을 들고 나온 이가 있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동상 수상곡 ‘젊은 연인들’을 부른 ‘서울대트리오’의 멤버 정연택(56) 명지전문대 교수이다.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기타줄 튕기며 노래 부르던 그가 흙을 주무르며 아마추어 도자작가 키우기에 나선 이유가 있다.
지난 11월 8일 서울 서대문구 가좌로에 있는 명지전문대 도자연구센터에서 정 교수를 만났다. 36년 전 무대 위의 날렵했던 청년은 넉넉한 반백의 중년이 돼 있었다. 작업실 한쪽엔 기타 두 대가 놓여 있었다. 노래는 여전히 그에게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수업시간이나 강연을 할 때도 사람들이 원하면 기타를 들고, 공연이 있으면 그의 밴드들을 몰고 출동한다. 그는 지난 10월 23일에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기타를 들고 올라 ‘젊은 연인들’을 불렀다. 지난 7월 MBC가 시청률 저조 등을 이유로 대학가요제 폐지를 발표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이 나서서 마련한 ‘2013 대학가요제 포에버’란 공연이었다. 그는 일하는 틈틈이 공연 준비를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면서 가수가 안 되길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에서 도자기를 공부했다. ‘젊은 연인들’이 국민노래라고 할 만큼 인기를 얻었지만 그는 흙을 선택했다. 졸업 후 3년여 경기도 과천에서 도자기 공방을 하다 1989년에 명지전문대에 자리를 잡은 것이 25년이 돼 간다. 작품만 하면서 살고 싶었지만 전업작가로는 생활이 힘들었다. 그는 “학교로 작전상 후퇴를 했는데 아직도 전진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전략적 후퇴였지만 전술은 훌륭했던 듯하다. ‘정연택 교수에게 배우고 싶어 명지전문대를 선택한 학생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을 보니 그는 좋은 선생이었다. 열심히 가르쳐서 학생들을 사회에 내보냈지만 도자공예 작가가 먹고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힘들게 사는 제자들을 보면서 그는 늘 안타까웠다. ‘사람들에게 도자기를 알리고 전업작가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이 공방에 재고로 쌓여 있는 생활도자기들을 파는 ‘B급 전시’였다.
작가들은 재고 정리하고 소비자는 싸게 살 수 있으니 두루 좋은 일이다 싶었다. 값비싼 도자작품 놓고 쳐다만 보는 전시가 아닌 작가와 소비자가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바자회 같은 전시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B급 전시’라고 이름 붙이자니 작가들 작품에 실례가 되는 것 같아 붙인 이름이 으뜸 다음을 뜻하는 ‘버금이전’이었다. 2009년 11월에 10여명의 작가를 모아 열었던 첫 번째 버금이전은 기대 이상이었다. 3일간 총 판매액이 3000만원을 넘었다.
가능성을 본 정 교수는 매년 전시를 목표로 하고 ‘버금’의 의미를 작품뿐만이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적용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버금이 작가’를 만들었다. 전업 작가 작품과 버금이 작가 작품을 동시에 판매하자는 생각이었다. 정 교수는 “도자기의 가치를 알려면 직접 만들어봐야 얼마나 귀하고 좋은 줄 안다”고 말했다.
지진희, 진미령 등 연예인을 비롯해서 방송PD, 교사, 셰프, 목수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버금이 작가로 모였다. 대부분 '완전 초보'들을 작업장에 불러 기초부터 가르쳤다. 학원처럼 커리큘럼에 따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만들고 싶은 작품을 정해 단기속성으로 맞춤 지도를 했다. 수강료는 물론 재료값도 무료. 대신 버금이 작가들이 만든 작품 판매대금은 전액 기부하는 조건이다. 전업 작가와 버금이 작가가 동시에 참여한 제2회 버금이전은 손님도 많아지고 매출도 늘었다. 작가들이 만든 생활도자기를 50% 이상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이다 보니 매년 전시를 기다리는 매니아들도 생겼다. 버금이 작가들이 지인들을 불러 모은 덕분에 마케팅 효과도 톡톡히 봤다. 버금이 작가는 탤런트 지진희처럼 계속해서 참여하는 사람도 있지만 매년 새로운 얼굴이 수혈되고 있다. 지진희는 버금이전이 계기가 돼서 한국공예트렌드페어 홍보대사가 됐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버금이전'이 11월 29일(금)부터 12월 1일(일)까지 서울 중구 정동의 컨퍼런스 하우스 '달개비'에서 열린다. 정 교수의 뜻을 돕기 위해 공예계 인사 3~4명이 운영위원으로 나섰다. 달개비 함재연 사장도 운영위원으로 1회 때부터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버금이전이 열리는 기간 내내 한 층 전체를 제공하고 음식 서비스까지 하고 있다. 버금이 작가 수익금은 전액 기부하고 전업 작가 판매액에서 수수료를 받아 버금이 작가 교육비 등 경비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는 버금이전 판매액 중 450만원을 경기도 고양시의 한 입양기관, 북한탈북자 싱글맘을 위한 단체 등에 기부했다. 버금이전 마지막 날엔 전시장 한편에서 작은 공연을 연다. 그도 물론 기타를 들고 나선다.
애초에 전업 작가들을 위해 시작했지만 이제는 버금이 작가들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 사용할 사람을 먼저 교육하는 것이 작가를 지원하는 것보다 공예문화 발전에 효과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소비자가 생산에 참여하고, 자아성숙을 위한 여가생활이 되고, 노년에 일거리가 될 수 있고, 창조경제가 바로 이런 것이지요. 창조경제도 사람을 먼저 길러야 합니다. 디자인 강국인 핀란드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공예교육 등이 잘돼 있잖아요. 공예가 단지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삶의 패턴이나 무형적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버금이전이 단순히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 문화운동이 되고 사회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내년에는 전업 작가들을 위한 수익모델로 투어상품을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 도자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공방에 데리고 가서 작가와 직접 만나고 작품도 구입하는 문화여행 상품이다.
밖으로 도자문화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는 그가 학교 안에서 선생으로서 쌓아온 일이 있다. 1997년부터 졸업생 1~2명을 선발해서 키우는 인큐베이팅 작업이다. 도자제품연구회를 만들어 연구 과정을 개설하고 4년을 더 가르쳤다. 교실 옆에 쪽방을 만들어서 조선시대 백자를 그대로 재현하는 연습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고 감각을 익히게 하는 등 전문대 2년 교육으로 부족한 것을 개인적으로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월급 명목으로 용돈 줘 가면서 키운 학생이 2004년까지 17명이었다. 경비는 어떻게 마련했을까. “내가 돈이 어디 있겠어요. 1000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서 일단 쓰고 작품 제작 주문이 들어오면 채워 넣느라 바빴죠.” 문제는 제조시설이 없다 보니 교육도 수익 사업도 어려웠다. 마침 2008년 정부가 학교기업에 지원을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연구생 17명으로 기업신청을 해 4억5000만원을 지원받았다. 학교가 나머지를 투자해 작업장, 전시실 등을 갖춘 MJ아트세라믹 연구소 건물이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매년 도자운동의 정예군이 돼줄 버금이 작가들이 양성되고 있다.
그가 사진촬영을 위해 기타를 들고 추억의 노래 ‘젊은 연인들’을 부르면서 노래에 얽힌 기가 막힌 사연을 들려줬다. 서울대트리오의 멤버는 그와 민경식·민병호이다. ‘젊은 연인들’은 원래 민병호의 큰형인 민병무가 만든 곡이었다. 1971년 12월 25일, 서울 충정로에 있던 대연각호텔에서 공연이 있었던 민병무는 뒤풀이 후 주최 측이 마련해준 방에 일행 2명과 함께 잠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바로 세계 최대의 호텔 참사로 기록된 대연각 화재가 있던 날이었다. 사망자 163명의 명단에는 민병무도 들어 있었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민병호가 죽은 형의 노래를 들고 참가해 보자고 찾아왔다. 당시 그가 4학년 때였다. 작은 화실을 하고 있던 데다 군 입대 문제도 걸려 있어 몇 번을 거절하는 그를 민병호는 끈질기게 설득했다.
참가 신청자가 얼마나 많았던지 서울에서만 예선이 2차례 치러졌다. 1차 예선에 나가 보니 다들 실력들이 만만치 않았다. “민병호에게 기타줄 풀고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돌려보내고 잊고 있었죠. 신문에 1차 합격자 명단이 발표됐는데 이름이 있는 겁니다. 2차 예선에 올라가서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당시 사회를 봤던 이수만이 와서 귀띔을 해줬어요. 같은 서울대생이니 잘 아는 사이였거든요. 2차 예선에서 우리 점수가 제일 높다면서 대상도 노릴 수 있겠다고 했어요. 막상 본선에 올라가 대상을 기대하고 있는데 동상 수상자로 우리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우리들 표정이 그때 안 좋았어요. 하하.”
‘서울대트리오’라는 이름도 팀명도 없이 참가한 그들을 보고 담당 PD가 “세 명 다 서울대생이니 서울대트리오로 하라”면서 즉석에서 붙여준 것이다. 대한민국 대형참사와 함께 묻힐 뻔했던 ‘젊은 연인들’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길은 험하고 비바람 거세도 서로를 위하며 눈보라 속에도 손목을 꼭 잡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리~’
노래 가사처럼 기타 들고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하던 그는 이제 흙을 통해, 도자문화를 통해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