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수말과 씨수소의 화려함 뒤엔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조연들이 있다.
한국마사회 제주목장에는 '철원'(한라마)이라는 말이 있다. 경주마와 제주 조랑말 사이에서 난 철원이는 8등신 같은 경주마에 비하면 짤막한 단신이다. 이 철원이의 역할이 시정마(始精馬)다. 씨수말과 씨암말이 합방하기 전 씨암말을 애무해 흥분시켜 놓는 것이다. 시정마는 씨수말의 안전 문제 때문에 생겼다. 발정하기 전 씨암말이 뒷발질로 씨수말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씨수말은 한 해 많아야 100마리의 씨암말을 상대하지만 올해 17년차 시정마 철원이는 700~800마리의 씨암말을 상대한다. 하루에 열 번이 넘게 투입된 적도 있다. 철원이가 시정마가 된 것은 씨암말의 뒷발에 차여도 꿋꿋하게 들이대 끝내 암컷을 흥분시키고야 마는 투지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말산업연구소 이진우 차장은 "제주 조랑말의 강인함을 물려받은 철원이는 어지간히 발길질 당해도 끄떡없다"고 말했다.
철원이가 흥분한 나머지 씨암말에게 족보 없는 씨를 임신시켜버리면 마주(馬主)는 허망해진다. 사실 키작은 철원이가 키큰 경주마 암말을 임신시킬 가능성은 낮다. 그래도 혹시 몰라 커다란 콘돔을 차고 등장한다. 실제 콘돔이 아니라 비닐로 된 커버로 배와 성기까지를 아예 덮어씌운다.
씨암말이 적당히 흥분하면 씨수말이 등장하고 철원이는 하릴없이 끌려나간다. 울분이 안 쌓일 수가 없다. 마사회 관계자는 "한 해 막바지가 되면 적당한 씨암말하고 합방을 시켜 철원이의 회포를 풀어주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씨수소 뒤에도 희생양이 있다. 씨수소를 선정할 때 고기의 질은 도축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씨수소 상비군들을 일반 농가의 씨암소와 교미시켜 송아지를 얻는다. 이 송아지들을 키워서 도축해 고기의 질을 본다. 한 마리의 씨수소가 탄생할 때까지 이렇게 희생되는 씨수소의 2세가 10마리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