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을 수 있는 전기 플러그를 만든 친구(디자이너 최민규)도,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의자를 만든 친구(디자이너 김기현)도 우리 학교 출신이죠. 그러고 보니 기아자동차 최고디자인책임자(CDO) 피터 슈라이어도 있네요. 우리 학교, 한국하고 인연이 참 깊어요."
암기라도 한 듯 한국과 관련된 동문(同門)을 줄줄 꿰는 이 사람, 영국 왕립예술대학(RCA·Royal College of Art) 폴 톰슨(54) 총장이다. RCA는 176년 역사를 지닌 영국 최고의 예술 학교. 한국 유학생이 가장 선호하는 예술대학이기도 하다. 이 학교 톰슨 총장이 주한 영국문화원 초청으로 방한했다. 영국의 융·복합 교육을 전파하러 왔다. 톰슨 총장은 런던 디자인뮤지엄 관장, 뉴욕 스미스소니언 쿠퍼 휴잇 디자인뮤지엄 관장을 역임한 디자인계 주요 인사다.
"17년 만에 왔는데 변화가 충격적입니다." 5일 만난 톰슨 총장은 1996년 처음 서울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서울에서 열린 '영국 현대 디자인전'을 기획했다. "삼성이 막 '디자인 경영'을 내세웠을 때였어요. 디자인을 강화해서 세계 가전 업계에서 신(神)과 같았던 '소니'를 이기겠다 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네요."
디자인 분야에서 겨우 걸음마를 뗀 개도국이었던 한국은 이제 디자인 선진국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그는 "RCA 학생 수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RCA 전체 학생 1400명 중 한국 학생은 70여명. 영국과 EU(유럽연합) 국가 학생을 빼고 단일 국가로 최대란다. 미국(40명), 중국(30명)보다 많다. 톰슨 총장은 "특히 자동차 디자인·엔지니어링 분야에선 탁월하다"고 했다. "몇 해 전 자동차 디자인과에 유일하게 한국 여학생이 있었는데 졸업하자마자 '꿈의 직장'인 벤틀리에 입사했어요. 같은 과 남학생들이 얼마나 배 아파했는지, 하하." 총장이 기억하는 그 여학생은 벤틀리 영국 본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김보라씨다.
RCA에는 현재 56개국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일부 과는 경쟁률 17대1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인재를 어떻게 뽑을까. "'잘하고 싶다'는 의지만 있는 학생은 안 뽑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배워가고 싶은지 분명히 아는' 학생을 뽑습니다."
유난히 한국 학생들이 RCA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사실 버버리 사장이 된 크리스토퍼 베일리, 영국 최고 스타 디자이너 토머스 해더윅 같은 '빅 네임(big name·명사)'의 영향이 많은 것 같다"면서도 "RCA만의 양질 교육 시스템이 있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RCA는 요즘 '협업'을 잘할 수 있는 창의적 인재 육성에 힘쓴다고 했다. "21세기 화두는 '팀으로 일하기(working in a team)'입니다. 상품·시스템·서비스·기술, 모든 게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개인이 혼자서 도저히 해낼 수 없어요. 한 분야만 아는 전문가를 키우기보다 다른 분야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RCA는 여러 학문을 융·복합한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 커리큘럼'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톰슨 총장은 25년간 운영하고 있는 IDE(Innovation Design Engineering·혁신 디자인 엔지니어링) 과정을 예로 들었다. 예술 전문대학원인 RCA와 이공계 명문인 임피리얼칼리지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이 함께 만든 코스. 이공계 학생은 디자인적 사고를 배우고, 디자인과 학생들은 생산·제조 과정을 공부한다. 지난 7월 시작한 GID(Global Innovation Design·글로벌 혁신 디자인) 과정은 임피리얼칼리지, 미국 프랫(Pratt) 인스티튜트, 일본 게이오대학 등 3개국 4개 학교가 함께 만든 코스. 다학제를 국경을 넘어 확대했다. "2년 동안 런던, 뉴욕, 도쿄 세 도시를 돌아다니며 360도 입체적인 디자인을 보고 배우는 겁니다." 톰슨 총장은 "한국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를 위해서도 이런 다국적, 다학제를 바탕으로 창의적 인재를 기를 필요가 있다"며 한국 대학의 동참을 호소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기자의 명함을 받아 든 톰슨 총장에게 조선일보의 C자 형태 로고를 만든 디자이너(탠저린 이돈태 대표)도 RCA 출신이라 귀띔했다. "어쩐지 빨간 로고가 감각적이라 했더니!" 그가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