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 5m60㎝, 세로 1m98㎝의 대형 캔버스가 경기도 양평의 스튜디오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오래된 흑백사진. 어느 유치원의 원아(園兒) 합동 기념사진이다. 화가 안창홍(60)은 인터넷 사진 경매 사이트에서 구매한 이 사진을 캔버스에 전사(轉寫)했다. 붓을 들어 인물들의 눈을 다 감긴 다음, 그 위에 노랑 물감으로 온통 점을 찍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흑백사진 위에 노랑나비 떼가 몰려 앉은 것처럼 보인다. 저 그림 속 어린아이들은 아마도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고, 머리에 서리가 내렸을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는 아스라하고, 아득한 느낌.
안창홍은 "명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그림 속 인물의 눈을 감겼다. 관람객도 자기의 눈 감은 모습을 연상하며 내면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건 '세월'이다. 유한한 시간의 애틋함을 그려내기 위해, 아지랑이 같은 점을 찍었다"고 했다.
이 그림, '봄날은 간다'가 7일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개막하는 안창홍의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에 나온다. 지난 4월 제25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안창홍은 줄곧 이 그림에만 매달렸다. "낮 11~12시쯤 아점 먹고, 작업 시작하면 거의 새벽 1~2시까지 그림만 그렸다." 작품 50여점이 나오는 이번 전시회에 신작은 두 점. 사진관에서 버린 필름을 주워서 그 안의 인물의 얼굴을 재조립한 '부서진 얼굴' 연작이 미술관 벽에 걸린다. 구작으로는 현대사회의 가족 해체 문제를 다룬 안창홍의 대표작 '가족사진' 연작, 우리 이웃들의 가감 없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현대 인물화' 연작 등이 소개된다.
1980년대, 민중미술가로 활동하며 날생선처럼 펄떡거리는 화면을 내보였던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내 관심사는 '인간'이었다. 세월의 풍파를 딛고 끈질기게 살아나가는 소시민의 건강함과 생명력, 거대한 역사 앞에서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 그런 걸 그리고 싶었다."
전시 장소인 조선일보 미술관은 150평(495㎡). 안창홍은 "작가 입장에선 지나치게 넓어 끔찍한 공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작가. "대규모 전시를 대비해 언제나 '총알 1발 장전' 상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쓸쓸히 병사(病死)한 이중섭(李仲燮·1916~1956). 대학 졸업장 없이, 독학(獨學)으로 거리에서 그림을 배운 안창홍. 둘 사이의 연관성을 묻자 안창홍은 "이중섭은 자유주의자이자 로맨티스트였다. 작품 성향은 나와 다소 다르지만, 얽매이지 않은 예술가로서의 몸짓은 나와 닮았다"고 했다.
'이중섭미술상 수상'이라는 낭보(朗報)는 그의 작품세계에 커다란 전기(轉機)로 작용했다. 수상기념전에 매달리다 잠시 머리 식힐 요량으로 지난 여름 한 달간 그리스·이탈리아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안창홍은 "지중해 풍경을 소재로 한 신작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바다와 하늘이 만들어내는 무서울 정도의 적막감, 그러면서도 지극히 탐미적인 풍경, 그리스 현대사의 우울함. 그런 것들을 엮어 작업하려 한다. 숙소로 돌아오면 풍경이 눈앞에 어른거려, 동행이 잠든 사이 화장실에 불 켜놓고 그림 그렸다." '인간'에서 '자연'으로 세계를 확장시켜가려는 이 화가는, 이중섭미술상 상금 1000만원을 모두 유니세프에 기부한다.
전시는 17일까지. (02)724-6322, 6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