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문을 연 서울동물원, 104년 역사 내내 안고 가야 하는 숙제가 있다. '번식(繁殖)'이다. 대(代)를 잇기 위한 노력은 인간과 다르지 않다. 실패하면 동물원의 존립에 영향을 준다. 평생 갇혀 살아야 하는 동물에게 번식은 인간보다 더 큰 숙제일 수 있다.

경기 과천시에 있는 서울동물원 고릴라 우리 내에서 암컷 고릴라 '고리나'와 수컷 '우지지'가 마주 보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짝짓기를 시도하는 흰코뿔소 수컷 '만델라'와 암컷 '초미'의 모습.

지난 10일 서울대공원 동물원 우리에 있는 고릴라 '우지지'가 한참 동안 컴퓨터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번식을 위해 작년 12월 영국포트림동물원에서 데려온 열아홉 살 수컷 '로랜드 고릴라'다. 이 고릴라는 세계에 500마리 정도밖에 없다.

모니터에는 검은 고릴라 부부가 짝짓기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동물원 우리 한구석에 있는 수컷 고릴라가 암컷 고릴라 위에 올라탄 모습이다. 고릴라용 '야동(야한 동영상)'인데, 쾌락을 위해 만드는 인간의 야동처럼 적나라한 장면은 없다. 이 동영상은 일본에서 제작됐다. 주인공인 암수 한 쌍은 일본 교토 시립동물원의 고릴라다. 기록용으로 촬영해 보관하고 있던 동영상을 마침 일본에서 연구 중이던 서울동물원 관계자가 "서울에 있는 고릴라의 번식이 시급하다"며 요청해 지난 7월 들여온 것이다. 동물원은 이 야동을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틀어놓는다.

젊고 건강한 우지지가 야동을 보는 이유 중 하나는 동물원에서만 자랐기 때문이다. 우경미 사육사는 "야생 상태에 있지 않으면 짝짓는 방법을 모를 수 있기 때문에 학습 목적도 있다"고 말했다.

우지지가 관계를 맺어야 하는 상대는 1978년 태어나 1984년부터 서울동물원에서 살아온 암컷 '고리나'. 동물원이 '젊은' 수컷을 수입하고 야동까지 보여주는 것은 올해 서른다섯 살인 고리나가 언제 폐경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릴라의 평균수명은 마흔 전후. 정확한 배란기를 알기 위해 사육사는 매일 고리나가 누는 소변을 받아 사람용 배란검사 종이를 통해 체크하고, 배란기가 가까워지면 울타리를 모두 검은 천으로 둘러싸서 관람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

야동에 비아그라까지

고리나에게 우지지는 두 번째 남편이다. 1984년부터 함께 산 전 남편 '고리롱'(1969년 생)과는 2세를 보지 못하고 2011년 2월 사별(死別)했다. 이때도 동물원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2009년 고리롱과 고리나가 각각 마흔과 서른을 넘기자 초조해진 동물원은 '실버 프로젝트'란 이름 아래 2세 생산 작전에 돌입했다. 동물원은 신선한 과일, 닭백숙 같은 보양식을 공급했다. 일종의 '정력제'였다. 이때도 고릴라 야동을 우리 안에서 틀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람을 치료하는 비뇨기과 전문의에게 진단도 맡겼다. 국내에서는 번식을 전문으로 하는 수의사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서울 강남에 있는 한 병원 의사를 찾아냈다. 마침 이 의사는 고릴라와 같은 유인원을 연구한 경력도 있었다. 이 의사는 고리롱 부부의 피를 뽑아 검사하고 배설물도 꼼꼼히 체크한 뒤 수컷인 고리롱에게 비아그라와 쌍벽을 이루는 발기부전치료제 '시알리스'를 먹도록 처방했다.

서울동물원 김보숙 동물원운영팀장은 "고리롱이 알약 그대로 먹지는 않아 약을 빻아서 평소에 잘 먹는 우유에 타서 먹게 했다"며 "기간은 석 달, 간격은 1주일에 4번씩이었다"고 설명했다. 효과가 있는 듯했다. 행동이 느린 고리롱이 우리 여기저기를 빠르게 돌아다니고, 낮잠도 줄였다. 자신의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목격됐다. 하지만 정작 고리나에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울동물원 열대조류관에 있는 붉은코뿔새 모습. 동물원은 붉은코뿔새 암수의 합사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능력 있는 수컷을 선호

번식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고릴라 우리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희귀동물 '흰코뿔소'도 마찬가지다. 흰꼬뿔소는 국제적 멸종위기 1급 동물. 서울동물원은 2011년 일곱 살이던 수컷 '만델라'를 싱가포르 동물원에서 데려왔다. 원래 서울동물원에는 암컷 세 마리와 고령인 수컷 한 마리가 있었는데 수컷은 지난해 사망했다. 동물원 측은 이듬해 초 암컷 가운데 가임기에 있는 열일곱 살짜리 '초미'와 새신랑 만델라를 합사시키는 데 성공했고, 짝짓기까지 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동물원 관계자는 "조만간 좋은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열대 조류 가운데 하나인 '붉은코뿔새'의 짝짓기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애벌레나 굼벵이처럼 단백질이 풍부한 먹이를 수컷에게 주는 경우가 많다. 붉은코뿔새 암컷은 먹이를 잘 물어오는 능력 있는 수컷을 좋아한다고 한다. 수컷이 암컷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도록 먹이를 수컷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이다.

함께 있다고 하지 않는다

동물은 사람과는 달리 수컷과 암컷을 오랜 기간 함께 생활하게 한다고 해서 짝짓기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싸움이 일어나 자칫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2010년 7월 서울동물원은 붉은코뿔새 암수 한 마리를 합사시켰다. 둘은 비교적 사이좋게 지냈다. 그런데 작년 6월 새벽 시간에 돌연 암컷이 수컷을 잔인하게 공격했다. 부리로 머리를 4차례 세게 쪼았고, 결국 수컷은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 동물을 데려올 경우 곧바로 수컷과 암컷이 직접적인 접촉을 못 하도록 한다. 한두 달은 창살을 사이로 서로 얼굴을 맞대거나 냄새를 맡게 한 뒤, 합사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한곳에 풀어놓는다.

동물도 '눈높이'가 중요

서울동물원이 지금 번식을 위해 애타게 찾는 암컷이 있다. 말레이곰이다. 동물원에는 아홉 살짜리 수컷 '꼬마'와 서른세 살짜리 암컷 '말순이'가 있다. 동물원은 2억6000만원을 들여 새집까지 마련해줬지만 나이 차를 극복하지 못했다. 꼬마는 스물네 살 연상인 '말순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꼬마가 여섯 살이던 2010년 12월 6일에는 우리를 탈출해 청계산으로 달아났다가 9일 만에 포획된 적이 있다. '짝짓기 스트레스'가 탈출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동물원은 결국 꼬마의 마음에 드는 젊은 신부를 각국 동물원에 수소문하고 있다.

야생동물과 달리 동물원 동물이 짝짓기에 소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윤정상 서울동물원 종보전팀장은 "지능이 높은 동물은 사람처럼 배우자에 대한 선호가 있는데,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짝짓기를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며 "야생과 달리 동물원에는 배우자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번식에 어려움이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