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4일 동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대봉동 만리장성’ 앞으로 가자고 했다. 서울에서 전화했을 때 김태식씨는 “택시 기사에게 ‘대봉동 만리장성’으로 가자고 하면 된다”고 말했었다. 약속 시간보다 여유가 있어 대봉동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수 양복점’ ‘베르가모 김태식 테일러’ ‘로마 테일러’…. 대봉동 명륜길 주변에는 맞춤 양복점과 맞춤 양장점이 즐비했다. 마치 서울의 소공동길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베르가모 김태식 테일러’는 명륜길 173번지 1층에 자리 잡고 있다. 명륜길에 들어서면 누구라도 ‘베르가모 김태식 테일러’를 금방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철탑산업훈장 수훈’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양복점 입구 처마 밑에 축하 화분 10여개가 놓여 있으니 말이다. 그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축하난과 현수막으로 인해 한번쯤은 쳐다보고 갈 것이다.
김태식 대표는 지난 9월 2일 정부로부터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철탑산업훈장은 산업계 기술인에게 주는 훈장으로는 은탑, 동탑에 이어 세 번째 훈장이다. 맞춤양복 업계에서 산업훈장을 받은 사람은 김 대표가 처음이다.
기자 일행이 양복점 안으로 들어갔을 때 김 대표는 가봉 중이었다. 가봉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양복점 내부를 훑어보았다. 표창장, 명인증서, 상장 등으로 벽면에 빈 공간이 보이질 않았다. 이번에 받은 철탑산업훈장과 상패는 현관 진열장에 두고 있었다.
“재킷 길이를 조금 짧게 해드릴까요?” 가봉실에서 김 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춤양복점에서 가봉을 하는 모습을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기성복 시대에 45년간 맞춤양복이라는 한 우물을 파 철탑산업훈장의 영예를 안은 주인공 김태식 대표. 가봉을 마친 손님이 나간 뒤 김 대표와 마주 앉았다.
그가 양복업계에 뛰어든 것은 1968년.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친척이 운영하는 양복점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철탑산업훈장을 받은 직후 신문에 보도된 내용이다. 1968년이면 우리나라 국민 상당수가 보릿고개를 헤매고 있을 때. 김 대표는 1953년 경북 고령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먼저 학교를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배경이 궁금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는 고향의 논밭을 다 정리해 대처인 대구로 나왔다. 그 돈으로 기와집을 하나 사고 쌀가게를 냈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으신 분이라 장사 경험이 없었다. 쌀가게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되다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집안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다. 큰형님만 제대로 공부했고 나머지 형제들은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열다섯 소년이 할 수 있는 게 뻔했다. 그는 어렴풋하게 기술을 익혀야만 먹고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던 차에 친척의 소개로 외사촌 형이 운영하던 양복점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양복점이 괜찮은 직장이었다. 그때는 기성복이 없었을 때였다. 전부 양복을 맞춰 입을 때였다. 대명동 집에서 출퇴근을 하며 양복일을 배웠는데, 외사촌 형님집에서는 몇 개월 못하고 다른 양복점으로 옮겼다. 그 양복점에서 바지와 재킷 만드는 일을 배웠다.”
어떤 분야에서 명인이라는 호칭을 얻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를 키운 스승이 있다. 김 대표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김경무, 조관행, 이성우, 이재우 네 사람이 그의 스승이다. 먼저 당시 가나다양복점의 재단사 김경무씨.
“김경무 선생님은 당시 서울에서 스카우트되어 온 사람이었다. 그분이 저를 제자로 발탁했다. 그분에게 상의(上衣)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보통 사람이 5~7년 걸리는 전(全) 공정을 2년 만에 다 배웠다.”
두 번째로 그가 잊지 못하는 인물은 조관행씨. 조씨는 GQ양복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조관행 선생님으로부터는 다리미로 자리 잡는 것을 배웠다. 그분은 바느질도 중요하지만 다리미로 열처리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어깨 모양을 비롯해 전체적인 실루엣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배웠다. GQ양복점에서 3~4년 배우며 일했다.”
이성우씨는 맞춤양복업계의 대부로 통한다. 그의 이름을 내건 대회도 있다. 국제기능올림픽에서 12연패라는 전설 같은 기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김 대표는 일주일에 평균 한 번씩 서울로 올라가 이성우씨에게서 재단을 익혔다. 김 대표의 설명이다.
“이성우 선생님은 제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도의 장단점을 가르쳐줬다. 섬유의 올이 살아나도록 하는 재단에서의 선 처리 문제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이재우씨도 대구에서 알아주는 맞춤양복의 대가였다. 이재우씨는 이성우씨의 제자였다. 김 대표는 “이재우 선생님으로부터는 재봉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재우 선생님은 재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살아있는 양복과 죽어있는 양복의 차이를 가르쳐줬다.”
어떻게 열다섯에 선택한 일을 45년간 하게 되었을까. 그 당시 적성검사를 해서 양복일을 선택한 것도 아닌데. 적성에 맞는 일을 열다섯에 찾았다는 게 기적 같다.
- 언제 양복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을 했나.
"솔직히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 없다. 하지만 주변으로부터 내가 양복일을 하면 '잡념이 없어 보인다' '무섭게 집중한다' 등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양복 공정 과정에서 뭐가 잘 안 되면 잠을 못 자곤 했다. 그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양복일이 어렵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 처음 시작할 때는 어떤 마음으로 했나.
"처음부터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기술을 익히면 먹고사는 데는 걱정 없겠다고 생각해 시작했을 뿐이다. 단지 양복기술에서 최고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 대표는 1984년 대구 중구 중앙로에 ‘김태식 테일러’라는 이름으로 첫 양복점을 냈다. 서른한 살에 독립을 한 것이다. 그는 독립한 첫해가 45년 양복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1년 정도 하다가 양복일을 접으려고 했다. 독립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한 것이었다. 어느날 동료가 ‘어느 동에 양복점 자리가 났다던데, 한번 해볼래?’라는 말을 듣고 덜컥 시작했다. 손님 유치와 영업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가친척과 친구 손님으로 버텼는데, 이런 손님이 안 오니까 난감하더라.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고 했는데 친구가 ‘접으려면 완전히 망할 때까지 해보고 접어도 늦지 않다’라는 말을 해줬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 솔직히 한 번이라도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내가 이재에 밝았으면 다른 생각을 해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세상 변화에 둔감했다.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도 없고. 나는 어떻게 하면 양복을 잘 만들까, 이런 쪽으로만 생각했다. 양복일을 하면 스트레스 같은 걸 느끼지 않았다."
그는 한국맞춤양복기술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회의 거의 모든 상을 석권했다. 재단, 재봉 등 모든 분야에서 1위를 했다. 김 대표처럼 양복의 모든 과정에 통달한 사람은 흔치 않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 명인에 선정되었고, 2006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마스터스재단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철탑산업훈장은 지금까지 받은 모든 상의 결정판인 셈이다. 그는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양복 명인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특별한 취미도 없다고 했다. 총각 시절 잠깐 낚시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혼과 함께 낚싯대를 놓았다. 현재는 산책이 유일한 취미라고 한다.
맞춤양복을 한번 입어본 사람은 맞춤양복만 찾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맞춤양복은 기성복보다 훨씬 비싸다. 사실 1970년대 말 기성양복이 등장하기 전까지 양복 하면 당연 맞춤양복을 의미했다. 그러니 양복을 장만하는 일은 큰일이었다.
- 어떤 사람이 맞춤양복을 선호하나.
"경제적으로 여력이 있는 사람, 기성복이 자신의 체형에 맞지 않는 사람, 진짜 양복을 아는 사람, 세 부류다. 압축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맞춤양복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다."
김 대표의 가게에는 대구·경북지역의 웬만한 명사가 단골이다. 그러나 단골 손님의 실명을 밝히는 것만큼은 극구 사양했다. 본인들이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대표가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근거 중에는 ‘기술 전수, 후학 양성’이 있다. 김 대표는 1988년부터 대구교도소 직업훈련 강사로 활동 중이다. 양복기술을 전수해 재소자들의 사회복귀를 돕고 싶다는 뜻에서다. 양복업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기술강습회도 자주 연다.
김 대표는 스물다섯에 결혼해 딸만 셋을 두고 있다. 일본에서는 가업(家業)을 몇 대를 이어서 하는 일이 흔하다. “딸이어서 이 일을 가르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혹시 아들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 맞춤양복은 옷에 혼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무슨 뜻인가.
"무엇보다 양복을 사랑해야 한다. 양복일을 호구지책으로 삼으면 양복이 잘 되겠나. 즐거운 마음으로 긍정적인 마음으로 해야 한다. 손재주로 바느질을 곱게 할 수는 있지만 손재주만 가지고는 안 된다. 옷이 살아있게 하려면 인체공학을 이해하고 머리를 써야 한다."
- 몇 미터 앞에서 기성복인지 맞춤양복인지를 구별할 수 있나.
"7~8미터 앞에서도 안다. 맞춤양복은 기성복처럼 획일적이지 않아 개성이 있고 섬세하다. 실루엣을 비롯한 전체적인 맵시에서 차이가 있다."
재단실 앞에는 양복 천이 수십 개 쌓여 있다. 국적별로 나누면 영국, 이탈리아, 한국이었다. 한국은 제일모직 제품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국신사라고 할 때 ‘신사’는 맞춤양복을 입은 사람이다. 런던의 ‘새빌 로(Savile Row)’거리는 알려진 것처럼 수백 년을 이어온 맞춤양복의 메카다. 영국인을 포함한 세계의 부호와 명사들은 ‘새빌 로’에 와서 양복을 맞춰 입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독자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소비자들이 좋은 작품을 아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좋은 기술자가 계속 양성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