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술 마시고 담배 피웠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처음 담배를 피울 때 기침을 합니다. 처음 술을 마시면 쓴맛에 곧 뱉어냅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하나 싶었죠. 그러다 나중에는 술·담배에 중독돼 그걸 쾌락으로 즐깁니다. 쾌락이라는 것도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대표적인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64). 그가 26일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만들어내는 쾌락에 일침을 가했다. 지젝은 이날 경희대에서 '이데올로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경희대와 경희사이버대 주최로 열린 강연엔 젊은 대학생에서부터 나이 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청중 700여명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다양한 피부색의 유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임을 실감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태어난 지젝은 정신분석학 및 철학 박사다. 현재 류블랴나대 사회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영국 베크벡대 국제학장이다. 라캉, 헤겔에서부터 할리우드 영화와 음악 전문 방송 MTV를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글쓰기로 '문화이론의 엘비스 프레슬리'로도 불린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그를 '2012 세계의 사상가 100'에 선정했다. 그의 이름과 얼굴을 새긴 티셔츠가 팔려나가기도 한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쾌락을 되짚어 보라"고 주문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오기 직전 아이들은 일부러 소리치고 책상을 흔들며 난장판을 벌이죠. 선생님이 들어와 조용히 하라고 혼을 내면 교실은 조용해집니다. 이런 일들은 교실에서 마치 의식처럼 반복돼요. 아이들의 유희는 따지고 보면 선생님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즐기는 일들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인지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인지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해요."
그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했다. "자본가들은 설탕을 듬뿍 넣은 콜라를 마시게 했어요. 사람들이 그 맛에 길들자 과학자들은 그것이 건강을 해칠 것이라고 경고했어요. 그러자 설탕을 줄인 '다이어트 콜라'를 내놓았죠. 설탕을 넣지 않으면서도 단맛을 내는 허구적인 쾌락을 만들어냈죠."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이데올로기가 만든 쾌락으로부터 벗어나는 대안으로 불교를 제시했다. "불교를 통해 자본주의가 만든 세계와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자본가가 만들어낸 불필요한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죠.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 상태에 접어드는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