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추석이다. 살면서 한 육십 번 넘게 추석을 맞아 봤다. 추석에 대한 감흥은 무덤덤 자체다. 세월이 갈수록 그러하다. 그저 친척, 조카 아이들이 열댓 명쯤 내 집으로 몰려와 한나절 시끌벅적 떠들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날, 정도가 전부다.
추석 근처엔 성묘 가는 게 연중행사인데 나는 남들과 매우 달랐다. 우리 집안의 매우 특수한 얘긴데, 창피하지만 털어놓겠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부터 경기도 군포 어느 언덕에 나란히 묻혀 계신다. 내 기억에 나는 두 분이 거기 묻히던 날과 1주기 때 한 번, 그렇게 두 번 성묘를 다녀왔다. 그 후 십수 년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성묘를 갔다온 적이 없는 것 같다.
추석 때가 되면 누나, 형, 동생이 나한테 성묘 가자고 연락을 한다. 나는 늘 "난 바쁘니까 못 가고 누나, 형, 동생이 다녀와" 이런 식이고, 우리 식구들은 또 아무 소리 못 하고 나 빼고 다녀오곤 한다. 왜냐하면 우리 형제들 사이엔 그러한 묵계가 될 만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맞아 죽을지 모르는 소리지만 나는 내 형제들한테 직접 묻곤 한다.
"누나야, 형아, 동생아. 무덤에 누워계신 우리 아버지 조승권씨나 김정신 권사님이 내가 성묘 안 왔다고 화를 내실 분이냐?"
이런 식의 질문을 받으면 모두가 하나같이 "아니"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나는 또 "그렇지? 아니지? 그럼 됐어. 성묘 다녀오고 싶은 사람만 다녀와"하면 끝이다. 내가 큰소리를 치는 이유 중에는 매번 일 년에 한 번씩 지불하는 묘지 관리비를 내 쪽에서 낸다는 점도 있다.
실제로 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성격을 잘 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돼 13년을 누워만 계셨다.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가 불평 늘어놓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우리 동네 삽교감리교회에서 기도 제일 길게 잘하는 권사님으로 유명했다. 내 동생 영수의 증언에 의하면, 영수가 방학 첫날 마루 구석에 가방을 던져놓으면 방학 끝날 때쯤 책가방에 곰팡이가 슬곤 했는데 엄마 김정신 권사님은 "야, 영수야! 가방에 곰팡이 슬었다" 하시곤 그걸로 끝이었다는 것이다. 양친 두 분 다 요샛말로 '쿨'에 최고 대표였던 것이다. 넷째 아들 영남이가 성묘를 안 왔다고 삐치시거나 화를 내실 분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 DNA가 어디 가겠는가! 전에 언론에서 요청해 미리 쓰는 유서를 써본 적이 있다. 제1조가 바로 단호하게 내 장례식은 치르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내가 죽으면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내 시체를 담요에 둘둘 말아 차 트렁크에 싣고 곧장 벽제 같은 곳으로 달려가 화장을 시킨 다음, 가루를 들고 와 우리 집 앞 영동대교 위에 올라가 뿌려달라는 것이다. 왜 영동대교냐. 내가 영동대교를 보면서 20년 이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근데 주의할 게 있다. 그렇게 강물에 뿌리는 건 불법이란다. 그래서 한밤중 몰래 뿌려달라는 게 요구 중의 하나로 들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런 생각들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다. 나름 집안 내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 엉터리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 고향을 모두 충청도로 알고 있지만 내 진짜 고향은 황해도다. 6·25전쟁 때 아주 어려서 피란을 내려와 머물게 된 곳이 바로 충청도였을 뿐이다. 생일도 두 개다. 피란 내려와 아버지는 나를 44년생으로 등록했지만 엄마가 하는 소리 "영남이는 45년생이야. 내가 핏덩이를 들쳐 안고 해방 통에 산으로 숨은 기억이 있단다"라곤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44년과 45년 중간쯤에서 태어난 것으로 믿고 있다. 대강대강 살아왔다는 얘기다.
어릴 때부터 제사나 성묘 같은 건 아예 없었다. 왜냐하면 양친 모두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상하지만 우리 집은 종교 핑계로 제사를 단 한 번도 지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의 추석이 유난히 생각난다. 우리 집은 제법 큰 길가에 있었는데 추석날만 되면 동네 친구들이 추석 빔을 빼입고 우리집 앞을 지나 무덤이 많은 꽃산 쪽으로 성묘하러 갔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는 추석날 아침 내 친구들은 까만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아! 번쩍번쩍 빛나는 다섯 개의 금빛 단추들!
나는 어린 시절 그런 새옷을 단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다. 왜냐면 우리 엄마의 재봉질 솜씨가 워낙 좋아 담요 쪼가리 같은 걸로 큼지막하게 옷을 만들어 입혀줬기 때문이다. 학예회 때도 만날 큰 옷을 입고 팔다리 부분만 걷어올리고 나가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이들이 입고 지나간 가장 헐값의 광목으로 된 새옷. 물론 하루 이틀 지나면 금물감이 빠져 누렇게 변질되는 것이었지만 그 옷에 붙어 있던 번쩍번쩍했던 금단추. 추석날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던 금단추의 황금빛깔은 지금도 부럽기 한이 없는 추억이다. 그래서 내가 나중에 입체조각 미술작품으로 맨 처음 제작한 것은 기름 깡통을 잘라 만든 소년상이었다. 그 가슴에 단추 하나를 큼지막하게 달아 라는 제목을 붙였다.
내친김에 다른 얘기도 하겠다. 우리 집 바로 앞집엔 내 또래 옥분이네가 살았는데 그 집은 유난히 성묘나 제사를 챙기는 집이었다. 추석 때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늘 시도 때도 없이 제사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조 오백 년이 막을 내린 이유 중에 너무 과도한 제사가 들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옥분이네를 통해서 너무 절절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내가 관찰한 제사라는 것이 그랬다. 어린 맘이었지만 그 형식과 절차가 너무도 우스꽝스러웠다. 어느 날 아침이면 잠결에 옥분이 아버지의 "어이, 어이" 하는 곡소리가 들려온다. 아! 오늘 또 제삿날이구나. 오늘 또 국수 한 그릇 얻어먹는 날이구나. 가까이 가서 보면 옥분이 아버지는 이상한 삼베 옷에 커다란 삼베 모자에 짚으로 만든 벨트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어이, 어이" 곡소리를 내고 있다. 내가 봐도 진짜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그냥 소리만 그렇게 내는 것이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동네 사람이 있으면 얼른 곡을 끝내고 "아이고 이장님이세유? 어서 들어와유. 국수 한 그릇 자시고 가유. 옥분아 이년아, 이년아."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다닐 때, 한번은 방학 때 돌아와 물었다.
"참! 엄마는 그 유명한 교회 권사님이 어떻게 그렇게 가짜 꿀 만드는 일을 그렇게 오래도록 도왔죠?"하고 물으면 권사님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안 하면 방세가 안 나오는 걸 어카간!"
나는 그때부터 우리 인간은 좋건 싫건 형식에 매어 산다는 걸 깨닫고 지금도 그 형식이 거북스레 느껴지고 그래서 형식 없이 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다. 결혼 두 번에 이혼 두 번을 감행(?)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즐거워야 할 추석이 나한테만은 아직도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것도 나는 다 조상 탓이고 DNA 탓이라는 망상을 한번 해봤다.
조영남
69세. 서울대 성악과 졸업. 美트리니티 신학대 졸업.
가수, 예술가. MBC FM 진행 중.
저서: 《놀멘놀맨》 《예수의 샅바를 잡다》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어느날 사랑이》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