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여행 프로그램을 본다. 어느 날은 EBS 테마기행 같은 걸 종일 틀어놓고 책을 읽거나 요리를 하기도 한다. 딱히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하거나 경치를 감상하는 건 아닌데,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한 사람의 넋두리 같은 배경으로 그만한 게 없다고 생각해서다. 어느 날, 여행 방송 화면 속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 한 남자가 보였다. 수염이 덥수룩해보였다. 그 남자는 길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이거나, 노인이거나,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말이다. 저렇게 낯가림이 없으니 태생이 여행 작가였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내게 그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저 사람 이름은 맹물이야. 맹물다방이란 사이트를 운영했어."
H는 내게 그가 쓴 '다방 기행문'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기행문 속엔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커피를 배달하는 '김양, 최양'이 등장하고, 동네 덩치 형님들이 출몰하며, 세상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얘기들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사라지거나 스러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어떤 남자가 있는데, 그 사람은 목수처럼 서울 성북동 허름한 자기 집을 직접 고쳐 산다고도 했다. 순한 웃음과 달리 유독 뾰족한 글로 사람 속 시끄럽게 하는 불편한 글을 쓴다는 H의 말에 혹해, 문득 그의 글이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여행기가 범람하는 시대에 여행기를 읽는 일이 부쩍 따분해진 나는 '여행생활자'란 책을 사놓고도 꽤 오래도록 읽지 않았다. 사실 내가 먼저 읽은 건 그 책보다 한참 뒤에 나온 '생활여행자'란 책이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생활여행자'는 오르탕스블루의 '사막'이란 시로 시작된다. 또 '작가의 말'에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생활여행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적혀 있었다. "생활여행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활에서 나의 집을 잃고, 나의 가족을 잃고, 나의 친구와 애인을 잃고 뿌리 없이 사는 이야기다. 마치 여행 속에서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활 속에서 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내 밖의 풍경과 사건들 속에서 헤매면서 나의 것도 되지 못하는 누군가의 일상 속을 걷는 일이다. … 생활이든 여행이든 그것은 온전히 체험하는 자의 몫이다. 그것은 내 속에서 홀로 하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이 아니니, 차라리 나의 기원은 이런 것이어야 하리. 부디 나의 뜻대로 아무것도 되지 마소서. 그때라야 얼핏 고질적인 버릇과 증상으로 열심히 에너지를 소비하는, '나'라는 허튼 구름의 무늬라도 눈치챌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나일 때 당신은 당신이 아니고 나에 갇힌 또 다른 나였으니. 내가 모래알처럼 작아져서 나도 모를 무엇일 때에라야 당신은 혹 살아 있는 당신이 될까."
부디! 나의 뜻대로 아무것도 되지 마소서. 이 말이 강렬하게 와 닿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서, 결국 나를 줄여 환해진 바깥을 관찰하게 되는 책이었다.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나를 줄이면 당신의 환한 바깥'이란 말은 여행자의 시선을 덧붙이면 이해가 되었다. 낯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변하는가. 으레 인도에선 손가락으로 밥을 먹고, 서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5시간 연착된 열차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운전석이 거꾸로인 도시에선 보폭이 달라지고, 자유분방한 어느 도시에선 와이어 달린 브래지어 없이 편한 차림으로 길을 걷기도 한다. 관성으로 살아가던 일상의 내가 벗겨지면, 낯선 공간의 사소한 것들까지 내게 말을 건넨다. 문득 빌고 싶은 소원이 없어 다른 누군가의 소원을 빌어주었다는 어느 시인의 글이 떠올랐다. 나, 내 생각, 내 것이 중요해서 바깥을 엿볼 일 없었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생긴 거리감으로 세상을 바라본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모두 휴가를 떠난 8월의 텅 빈 동네에서, 어느 날 나는 내 일상을 여행객의 그것처럼 꾸며보기로 했다. 동네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다 사진을 찍고, 그것에 캡션을 달았다. 그리고 동네 공원 분수대의 솟구치는 물줄기 앞에서 팬티가 젖도록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았다. 현재 기온 영상 33.3도. 3이 3번 겹쳤으니 운이 좋다는 말을 사진과 함께 적어놓았다. 초콜릿을 들고 있다가 수압 때문에 미끄러진 아이는 기특하게 조금도 울지 않았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울지 않는 아이'라는 글을 썼다.
생활여행자가 되어 나는 일산의 백화점과 마트, 늘 지나가던 카페가 있던 골목들을 새롭게 걸었다. 모두 세 가게에 '임대문의'가 적혀 있었고, 새로운 버블티 가게가 문을 열었다. 나는 동네에 아홉 개나 생긴 버블티 가게 숫자를 세다가, 이들이 몽땅 망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 별생각 없이 걷던 길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치킨 가게 앞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여자아이는 맞은편 남자아이에게 답답한 듯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넌 그래서 되고 싶은 게 뭔데? 그게 없다는 게 말이 돼? 그럼 내가 네 가지 예를 들어줄게. 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실천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과 잘 융화되는 사람…."
얼마나 자주 비가 오고, 어찌나 더웠던지 모기조차 물리지 않은 기이한 여름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호수공원을 산책하던 나는 문득 여름 바람과 함께 가을 바람을 느꼈다. 문득 "가을날 색색으로 나뭇잎들은 물들었다. 여름철 초록빛 푸른 동색 뒤에 숨어 견딘 마음들이 죄다 증상으로 피어났다. 계수나무와 은행은 노랗게, 목련과 호두나무는 갈 빛으로, 그리고 단풍나무는 대놓고 붉게"라는 이 책의 문장이 떠올랐다. 단풍이 가을의 증상이라면 휴가를 마친 사람들이 돌아오는 휴가철의 끝은 나의 증상이다. 사람들이 돌아오면 나는 떠나야 한다는. 이 책의 부제가 '일상에 안착하지 못하여 생활이 곧 여행이 되어버린'이라는 건 뒤늦게 알았다.
●생활여행자: 'EBS 세계 테마기행' 멕시코 편과 이란 편의 큐레이터로 참여했고, 월간 '페이퍼'와 한겨레신문 등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여행 생활자 유성용의 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