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 폭염으로 전력 비상경보가 발령된 12일 오전 안전행정부는 전력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기관에 냉방기 가동을 중단하라고 지시했지만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과 서울의 한 세무서 등 일부 공공기관은 냉방 온도 기준인 28도를 한참 밑돌 만큼 냉방기를 돌렸다.

민간 시설 중엔 냉방 온도가 20도를 밑돌 만큼 심각한 냉방 불감증(不感症)을 보인 곳도 수두룩했다. 에너지 다소비 건물로 지정되지 않은 상업시설이나, 에너지 다소비 건물 안에 있더라도 냉방 온도 제한을 받지 않는 영화관 등 일부 업종은 "'개문(開門) 냉방'만 하지 않으면 걸릴 게 없다"며 과도한 냉방을 통해 손님들을 끌어 모으는 '냉방 마케팅'을 벌였다. "너무 춥다"며 손님들이 무릎담요를 덮는 곳도 있었다. 반면 냉방기를 전혀 돌리지 않은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등 정부기관은 실내온도가 30도를 넘어서고, 승강기도 홀수·짝수층별로 한 대씩만 가동해 민원인들이 사우나 같은 만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분씩 시달리기도 했다.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은 평소보다도 강한 냉방이 가동됐다. 본지가 'testo110 디지털 기온 측정기'로 측정한 결과 의원회관 로비는 오후 3시쯤에도 26도 안팎을 유지했고, 의원실들의 실내 온도는 26.5~27도로 공공기관 냉방 온도 기준 28도를 밑돌았다.

한 의원실의 김모 보좌관은 “냉방기 가동이 중단될 줄 알았는데 계속 돌아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의원회관 설비실 관계자는 “의원회관 리모델링 후 오늘부터 22일까지 일부 의원실이 이사하기 때문에 너무 더우면 작업이 곤란할 것 같아 냉방 온도를 27도로 낮췄다”고 말했다.

옷가게 - 12일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의류매장 실내 온도가 20.5도에 머물고 있다(왼쪽 위 사진). 영화관 - 12일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영화관 실내 온도가 22.4도를 가리키고 있다(왼쪽 아래 사진). 불 꺼진 정부서울청사 "찐다, 쪄" -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전기 사용을 줄이기 위해 불을 끄고 선풍기와 부채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오른쪽 사진).

서울 마포구 마포세무서 민원실은 이날 오후 2시쯤 실내 온도가 24.1도였다. 마포세무서 관계자는 “민원실은 민원인들이 덥다고 항의하는 경우가 많아 재량껏 온도를 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의 강의실·민원실·판매시설 등은 온도를 26도 미만으로 낮추지 못하게 돼 있다.

민간 시설들은 규제의 허점을 파고들며 과도한 냉방을 했다. 이날 오후 서울 명동의 한 화장품 매장에서는 긴 소매 카디건을 입은 점원이 자동문이 닫히지 않도록 문을 막고 서 있었다. 출입문 바로 옆 대형 에어컨의 희망 온도는 15도였다. 건너편 대형 의류매장의 매장 내부 온도는 20.8도였다. 이 매장 직원 이모(23)씨는 “지금은 좀 쌀쌀하지만 손님이 붐비면 금세 더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본지 취재팀이 이날 오후 1~3시에 서울 강남·북의 대표적 상권인 강남역 인근 상점 50곳과 명동역 인근 상점 50곳 등 총 100곳을 조사한 결과 74곳의 실내 온도가 26도 미만이었고, 이들 중 대부분이 20~23도였다. 정부는 여름철 민간 건물 냉방 온도를 26도로 제한하고 있지만 이 규정은 전력 다소비 건물에만 적용돼 소규모 건물은 이를 어겨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

명동의 한 외국인 대상 쇼핑몰 직원 김모(53)씨는 “전력난인 건 알지만 에어컨을 줄이면 손님이 오질 않고, 우리 가게는 에너지 다소비 건물도 아니기 때문에 문만 닫고 있으면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했다. 관할 중구청이 몇 차례 단속을 나오긴 했지만 ‘개문(開門) 냉방’은 하지 않아 경고도 한번 받지 않았다. 명동 화장품 매장 점원 김모(여·34)씨는 “(에어컨 가동 시) 문 닫으라고 해서 문 닫으니 매출이 30% 정도 떨어졌다”며 “이런 판에 26도 이상으로 맞추기까지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날 찾은 명동 매장 50곳 중 12곳은 30분 이상 연속적으로 문을 열어놓기도 했다. 중소 상점이 모여있는 좁은 골목에는 열린 문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에어컨 바람으로 골목 전체에서 냉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사정은 강남도 비슷했다. 한 대형 카페의 점원 배모(29)씨는 “18도로 맞춰도 덥다는 손님들이 많다”고 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은 카페에서 무릎담요를 덮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인근 영어학원을 다닌다는 최모(여·23)씨는 “학원과 카페가 너무 추워 공부를 오래 하려면 담요가 필수”라 했다.

영화관은 추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날 오후 3시쯤 강남 한 영화관의 직원은 상영관 온도가 20도라고 알려줬다. 2시간가량의 영화를 보고 나온 이민아(여·26)씨는 “영화관이 서늘할 줄 알고 미리 긴 팔 옷을 챙겨왔는데도 영화 보는 내내 추웠다”며 “영화 한 편 보려다가 냉방병에 걸릴 지경”이라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달 많은 사람이 동시에 이용해 실내 온도가 급격히 상승할 우려가 있는 영화관 등을 냉방 온도 제한 예외 구역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상영관은 아무리 에어컨을 틀어도 제재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