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시장경제가 조금씩 스며들면서 주민들 사이에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평양에서는 김정은 정권의 지원으로 수익 사업을 독점하는 거부(巨富)들이 생겨나지만 지방 농민들 사이에서는 "올해 죽지 않으면 내년에 후회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생활고가 심각하다.
◇북한에 등장한 '재벌'
지난 3월 세계적 투자가 짐 로저스가 싱가포르의 국제동전전시회에 나타났다. 로저스는 이 자리에서 개당 2500싱가포르달러(약 225만원)짜리 북한산 금화 13개와 개당 70싱가포르달러(약 6만4000원)짜리 은화 수백 개를 싹쓸이했다. 기념주화 형태로 제작된 이 동전들은 모두 북한의 부강주화회사가 출품한 것이었다. 부강주화회사는 북한의 '대기업'인 조선부강회사의 계열사다.
조선부강회사는 노동당 제2경제위원회의 '지도'를 받지만, 전명수 전 중국 주재 북한 대사의 아들인 전승훈 전 김일성대 교수가 사실상 독자 경영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회사는 오토바이 수입·생산을 주력으로 하면서 금속·기계·화학·전자·제약 등 계열사 8개를 거느리고 있다. 주화용 금을 대는 금광(金鑛)도 보유하고 있다.
부강제약이 만든 건강식품 '혈궁불로정'은 한국에서 팔린 적도 있으며 생수 회사도 운영하고 있다. 조선부강회사의 연간 거래액은 1억5000만달러에 이르며 베이징 모스크바 등 해외 지사 15곳을 거느리고 있다. 2009년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대상이 된 후 대외 거래는 위축됐지만 북한내에서는 여전히 활발한 사업을 하고 있다.
조봉현 IBK기업은행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부강그룹은 남한으로 치면 삼성에 해당하는 대기업 집단"이라며 "김정은 집권 후에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승훈의 동생 전영훈은 노동당 재정경리부 소속 회사의 사장으로 북한의 디젤유 수입을 독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소식통은 "북한 대기업의 수익금은 보통 당과 5대5로 분배한다"며 "전씨 형제의 재산은 최소 수백만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전씨 형제 외에 차철마라는 인물도 북한의 거부로 알려져있다. 차씨는 외교관 출신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소속의 외화 벌이 일을 독점, 수백만달러가 넘는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전해졌다. 통일연구원 관계자는 "북한에 시장화가 진전되면서 부의 집중에 따른 초보적 독과점 현상이 나타났고 당 간부들과 인연이 있는 일부 정경 유착형 거부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기업가들은 직접 시장에 나서기 어려운 당 고위층의 '검은돈'을 대신 투자해 사업하고 그 수익금을 다시 당 간부에게 돌려주는 형태도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북한도 '10대90의 사회' 가속화
전문가들은 1990년대 경제 위기 이후 북한은 철저하게 10대90의 사회가 됐다고 보고 있다. 식량 배급은 당 중앙 기관 간부 등 평양 중심 구역에 거주하는 100만명, 인민무력부와 보안성, 보위부 등 군 인원 150만명 정도에게만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 평양 출신 한 탈북자는 "이 중에서도 최고 특권층은 한국산, 중국산도 '못 믿겠다'며 먹지 않는다. 평양 용성 제1 특수식료품 공장에서 만드는 북한산 최고급품만 먹는다"고 전했다.
반면 지방의 일반 농민과 노동자들은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북한 사정에 밝은 정부 소식통은 "2011년 농사가 잘 되지 않아 작년 7월 이후 쌀값을 비롯한 물가가 대폭 올랐다"며 "고리대로 쌀을 구해 먹으며 버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올해 죽지 않으면 내년에 후회한다'는 자조(自嘲)적인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라고 말했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시장화'가 진전되면서 주민들 간 빈부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라며 "다만 이것이 북한 사회의 갈등을 확산시키는 불안 요소가 될지, 아니면 '북한 내 휴대전화 200만대 돌파'에서 보듯이 중간 계층을 확산시키는 쪽으로 가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