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100달러짜리 지폐로 가득 채우면 약 100만달러가 됩니다. 그런데 1850억달러가 되려면 100달러짜리 지폐를 6피트(183㎝) 높이로 쌓아서 이 골목길을 완전히 메워야 합니다. 그게 이 회사가 지난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인한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구제금융을 통해 받아간 세금의 액수입니다."
보험회사 AIG의 뉴욕 맨해튼 본관 앞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남성 가이드가 자신을 둘러싼 관광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4일 오전 10~12시(현지 시각) 맨해튼 남부의 금융지구 일대에서 진행된 '금융 위기 투어'에서였다. 인기 드라마에 등장하는 장소를 둘러보는'섹스앤드더시티 투어', 뉴욕의 도서관을 찾아가는 '도서관 투어' 등 관광 상품 천국 뉴욕에 금융 위기 투어까지 등장했다. '내부자가 안내해주는 월스트리트 이야기'란 주제로 만들어진 관광 상품이다.
이 투어는 도이체방크 부회장 출신으로 2009년 4월 퇴사한 중국계 미국인 앤드루 루안이 수십억달러어치의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부채담보부증권)'를 거래하던 자신의 근무 경험을 살려 만든 프로그램이다. 관광객들은 두 시간에 걸쳐 글로벌 금융 위기의 현장을 돌며 전문가들의 설명을 듣는다. 참가비는 1인당 50달러(약 5만5000원).
투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CDO'였다. 주택담보대출, 일반대출, 신용대출 등 부실 위험이 서로 다른 채권을 한데 모아 발행하는 CDO 때문에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투어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출발, 대규모 CDO를 발행한 골드만삭스와 부실한 CDO에 최고 신용등급인 'AAA'를 남발한 신용 평가 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를 차례로 들렀다. 이어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긴급회의를 열고도 아무런 대책을 내지 않아 파산에 이르게 한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투어가 끝났다.
가이드 샌디는 손님 상당수가 외국인임을 의식한 듯 비교적 명확한 발음으로 안내를 진행했다. 그러나 금융 전문용어가 워낙 많이 쓰인 탓에 사전 준비 없이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실제로 오스트리아에서 부모와 함께 뉴욕을 방문해 투어에 참가한 카타리나 웨버호퍼(28·변호사)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부모님께는 설명 내용과 금융 용어가 모두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금융 위기의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참가자들이 몰리면서 루안이 1인 기업으로 세운 관광 회사 '월스트리트 체험(Wall Street Experience)'은 급성장하고 있다. 메릴린치,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기업과 컬럼비아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등의 학교가 단체로 다녀가기도 했다. 현재 창업자 루안을 포함해 8명의 전직 금융 전문가가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다. 이 회사가 제공하는 다양한 월가 체험 프로그램에 1주일에 약 1000명이 참여하고 있다.
가이드는 투어 도중에 '지난 10년 미국 최대의 금융 사기 사태는?' 등 퀴즈(정답은 엔론)를 내면서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퀴즈를 척척 맞힌 캐나다 출신 회계사 크리스틴 에몬드(24)는 "5일 일정으로 휴가를 내 뉴욕을 찾은 김에 이번 투어를 신청했다"며 "내용이 깊이가 있고 재미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