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하지 않은 17세 흑인 소년을 총으로 살해한 히스패닉계 마을 자경단 단장 조지 지머먼의 무죄 판결로 미국 내의 '히스패닉 파워'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번 사건이 미국 내 소수 인종의 중심축이 흑인에서 히스패닉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표면적 쟁점은 정당방위 한계와 총기 사용 허가 범위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흑인 사회의 조직적인 반발 시위로 확산되고 있는 근저에는 히스패닉의 부상으로 미국 사회의 인종 구성이 바뀌고 있는 현실이 깔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백인 위주의 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소수 인종의 중심 세력이었던 흑인 사회와 새롭게 떠오른 히스패닉 사회가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16일(현지 시각) "그동안 잠재돼 있던 흑인-히스패닉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했다.

성난 흑인 시위대, 휴스턴 시의회 점령… LA선 상점 약탈하고 행인 공격도 -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흑인 소년을 사살한 히스패닉계 조지 지머먼이 무죄 평결을 받은데 항의하는 시위대 100여명이 16일(현지 시각) 텍사스주 휴스턴 시의회에 몰려와“인종차별을 중단하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와 오클랜드에서는 일부 시위대가 상점을 약탈하고 행인을 공격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미 센서스국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미 인구에서 히스패닉이 차지하는 비중은 16.3%, 흑인은 12.6%다. 이미 히스패닉은 숫자 측면에서 흑인을 압도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증가 추세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흑인은 12.3%가 증가한 데 그쳤지만, 히스패닉은 43%가 늘었다. 센서스국의 예측 프로그램에 따르면 2060년에는 미 전체 인구 중 히스패닉이 31%, 흑인이 15%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히스패닉 인구 성장세는 지속적인 이민 증가와 함께 높은 출산율에 기인한다. 대부분 가톨릭교도인 히스패닉들은 종교의 영향으로 가족 중심 사고가 강하며 피임·낙태를 잘 하지 않는다. 미국 내 히스패닉 여성은 1인당 2.99명의 아이를 낳아 인종별 출산율이 가장 높다. 흑인 여성은 2.13명, 아시아계 2.04명, 백인은 1.87명 순이다.

히스패닉은 숫자가 늘어난 만큼 미국 내에서 정치적·사회적 위상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 백악관과 의회가 적극 추진하고 있는 포괄적 이민 개혁법은 따지고 보면 '히스패닉 구애법'이다. 법안의 핵심은 불법체류자에게 미국 시민권 획득의 길을 열어주는 것인데, 현재 미국 내 불법체류자 1100만명 중 절대다수인 870만명이 히스패닉이다.

전통적으로 '백인 정당'인 공화당도 지난 대선 패배를 기점으로 히스패닉 파워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민개혁법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찬성 쪽으로 선회했으며,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 등 히스패닉계 스타 정치인 발굴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히스패닉의 세가 커지면서 동시에 흑인들과의 마찰도 커지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흑인들은 미국 건국 초기부터 국가 건설과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력 공급이라는 큰 발자취를 남겼다. 미국 내에서 소수 인종의 지위 향상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히스패닉의 비중이 늘어나기 전까지 흑인들의 몫이었던 값싼 노동력 위주의 일자리가 히스패닉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면서 흑인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있다. 흑인의 실업률은 지난해 말 14.1%로, 백인 실업률 7.4%의 두 배에 이르렀다.


☞히스패닉(hispanic)

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계 미국 이주민과 그 후손을 말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왔다고 해서 라티노(latino)라고도 불린다. 히스패닉은 인종(race)이 아니라 민족(ethnicity) 구분에 따른 개념이지만, 최근에는 혼재돼 쓰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