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기 전에 : 타이베이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타이베이'로 쓰는 게 맞다. 하지만 '타이페이'로 표기한 영화 제목은 그대로 유지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이 복잡한 일을 겪고 내가 일산으로 작업실을 옮겼을 때,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었다. "드디어!" 하지만 정작 작업실에서 글을 쓴 건 불과 며칠. 나는 작업실 앞 카페에 하루 대여섯 시간씩 죽치고 앉아 커피 몇 잔을 연거푸 마셔가며 원고를 썼다. 생각해보니 "카페라면 집 앞에도 많잖아! 작업실 구하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건 왜 그런 건데?"에 대답할 말은 없었다. 그렇다고 가뜩이나 밤늦게 다녀서 동네 백수처럼 보이는데 작업실 없으면 작가로 안 보일까 봐, 하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작업실 앞 카페에 앉아 1년 넘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이라는 제목의 긴 장편을 썼다. 살아 있는 것도,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반송장 상태. 잠을 자는 것도, 잠을 자지 않는 것도 아닌 반몽롱 상태. 에밀리 디킨스의 시처럼 '아침이 밤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자정은 어떤 모습일까'를 떠오르게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소설은 실연당한 사람들이 아침 일곱 시에 모여 식사를 하며 버릴 수도, 그렇다고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던 '실연의 기념품'을 교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유행이 끝난 플레어스커트나 애인의 취향인 해골 목걸이, 들을 수 없는 시디와 올 풀린 집시 모자는 실연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교환된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거대한 '상실의 공동체'가 들어 있었다. 그런 공동체라면 서로 상처를 교환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7월의 타이베이. 대만 관두 대학 안의 숙소에 머물 기회가 생겼다. 문득,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타이베이가 궁금해졌다. 타이베이는 내게 여름이면 40도를 넘나드는 만두 찜통 같은 곳으로, 절대 여름에는 가지 말아야 할 도시였다. 하지만 타이베이는 또 내게 차이밍량이나 에드워드 양, 후시아오시엔 같은 감독들의 매혹적인 영화 도시였다. '애정만세'와 '하나 그리고 둘', '비정성시와 밀레니엄 맘보'의 도시 말이다.
타이베이행이 결정된 후, 내가 좋아하는 후자의 이미지를 선택한 나는 대만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애정만세' 같은 옛날 영화부터 '청설' 같은 최신작까지. 그러다가 우연히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를 보게 됐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계륜미가 나오는 귀엽고 예쁜 영화였다. 영화를 보면서 맥락은 좀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친근했다. 지독한 자본주의 시대에 물건을 교환하며 생활한다는 옛날 방식이 고루하지 않다는 걸 강조하려는 그 아날로그적인 정서도 좋았다. 지독한 사연이 담긴 실연의 기념품이 아니라 포괄적 삶의 이야기가 담긴 잡동사니라는 점에선 달랐지만 말이다.
오랫동안 자신만의 카페를 차리는 것이 소원이었던 '두얼'은 접촉 사고로 자동차 수리비 대신 받은 '카라'를 처리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카페 오픈 기념 선물로 '쓸모없는 것'들을 가져오라는 메신저를 보낸다. 그리고 두얼의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그녀의 친구들은 필요 없는 물건을 잔뜩 가져온다. 카페에 쌓인 물건들을 처리할 일 때문에 골치가 아파진 '두얼'과 그녀의 동생 '창얼'은 카페의 물건을 다른 물건과 바꾸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두얼 카페'는 물건을 교환하는 카페로 점점 유명해진다.
자신이 애써 배운 커피와 디저트 기술이 무가치해지는 것 같아 우울해지던 즈음, 두얼에게 그녀의 브라우니를 좋아하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다. 그리고 35개나 되는 비누를 들고 와 특별한 물건으로 교환하고 싶다고 말하던 남자는 곧 비누 35개에 얽힌 도시 35곳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아이일 땐 한 손에 안길 정도로 작은 강아지였는데, 지금은 두 팔로도 안을 수 없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가 실연의 기념품으로 남았다는 여자가 있었고, 그 개를 키우고 싶다는 세 남자가 등장했다. 이제는 쓰지 못하는 버스 카드와 직접 털실로 짠 양말, 정성을 다해 만들었지만 한여름 단 몇 시간 만에 쉬어버렸다는 오색 김밥 도시락에 대한 이야기는 닫혀 있던 사람들 마음을 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사랑이 실패였다는 점과, 그들에게 남겨진 쓸모없는 물건들이 터무니없이 아름답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서글픔과 함께 청순한 시절의 향수를 느꼈다. 쓸모없는 것만이 진심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아닐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에선 실패한 사랑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썼다. 애인이 준 강아지가 개가 되고, 애인의 애칭이 이름인 그 개가 실연과 함께 다른 누군가에게 입양되는 이야기의 순환, 그때의 내겐 아무래도 누군가의 실패담과 그것의 교환을 통해 세상의 연애가 조금 더 현명해질지도 모른단 전망이 있었던 것 같다.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다면 예측할 수 없이 불안정한 진실을 인정하더라도 삶은 끝내 살아볼 만한 것이란 희망의 안간힘 말이다.
타이베이에 실제 이 카페가 존재한다는 얘길 들었다. 그곳의 카페가 물건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여행자라면 여행자의 문법에 따라 '우연'에 몸을 맡긴 채, 내 운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선 실제 타이베이 사람들이 나와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한다. "만약 세계 여행과 공부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신은 무엇을 고르겠습니까?" "당신 마음속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인가요?" 두 가지에 대한 내 대답은 '세계 여행'과 '사랑'이었다. 그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이 붙긴 하지만.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샤오 야 첸 감독 작품. 계륜미, 임진희, 장한이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