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10일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먼저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주문한 국정원의 자체적인 개혁과 관련해 "남재준 국정원장 취임 후 일부 부서 통·폐합과 조직 개편, 인사 제도와 업무 규정 정비, 인적 쇄신 등 강력한 자체 개혁을 추진해 왔으며 지난 대선 때의 댓글 의혹 논란 속에서 국정원 내 자체 전담 실무팀을 만들어 제2의 개혁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했다.
성명은 또 "국정원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한 것은 국가 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면서 "당시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어디에도 (야당)일부의 주장처럼 'NLL을 기준으로 한 등거리·등면적에 해당하는 구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한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국정원은 "국가 안보 수호 의지에서 공공 기록물인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을 적법 절차에 따라 공개한 것으로, 국가를 위한 충정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회담록에 나온,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진한 공동어로구역은) 현재 휴전선에 배치된 우리 군대를 수원~양양선 이남으로 철수시키고 휴전선과 수원~양양선 사이를 '남북공동관리지역'으로 만드는 '휴전선 포기'와 똑같은 내용"이라고 했다.
국정원의 이날 성명은 '하나 마나 한 개혁 이야기' '입장에 따라 찬성과 반대가 갈리는 NLL 문제' '국가 최고 정보기관으로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영토 포기에 관한 정치적 비유(比喩)'의 세 가지가 주(主) 내용이다. 그 하나하나의 당위(當爲)를 따지기 앞서 세계 최고 정보기관인 미국 CIA, 이스라엘 모사드, 영국 MI6 등이 그 기관의 역사에서 이런 식의 성명을 발표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한 나라의 최고 정보기관은 얼굴이 없어야 한다. 그늘에서 오로지 국익(國益)만을 위해 행동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없는 기관이라면 입도 없어야 한다. 건건(件件)이 나서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얼굴을 팔고 마이크를 잡는 것은 '하지하(下之下)'의 정보기관이다.
국정원 주장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영해(領海)를 포기하려 했거나 그런 의혹을 부를 만한 발언을 했다면 현직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되는 엄중한 문제다. 대통령의 국가 영토와 관련된 발언을 두고 국민이 '영토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거나 '영토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라고 갈리는 것 자체가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다. 영토나 주권에 관한 발언은 '대통령의 통치권적 권한'이란 방패로 보호될 수 없고 보호돼서도 안 된다.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의 진실을 가리려면 우선 여야가 국가기록원으로부터 회의록을 제출받아 열람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회의록을 열람하고도 여야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마당에 국정원이 "국가를 위한 충정" 운운하며 나서는 것은 여야가 뒤엉킨 진흙탕 싸움에 국가 최고 정보기관도 끼어들어 함께 뒹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으로서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만드는 치명적인 판단 착오다.
국정원은 이날 성명에서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는 "적법 절차를 거쳤다"고 했다.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은 노무현 청와대가 보관하다 국가기록원으로 넘긴 것과 국정원이 보관해 온 두 종류다. 이 중 국가기록원 보관본은 대통령기록물로 분류돼 국회의 3분의 2 이상 찬성 없이는 공개할 수 없다. 반면 국정원 보관본은 공공기록물로 분류돼 비밀 해제 절차를 거치면 공개하는 데 법적인 문제는 없다. 그러나 같은 기록물을 두고 서로 다른 두 법 규정이 상충한다면, 다른 기관도 아닌, 국가 안보에 관한 기밀을 유지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국정원이 어떤 기준을 더 중시하고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더구나 그 회의록 내용이 동맹 국가와 우방 국가들이 대한민국을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는 내용이라면 사정은 더욱 분명하다.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회의록을 공개했다"고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신뢰와 명예는 국정원의 명예보다 몇 백 배, 몇 천 배 더 중요하고 무거운 것이다. 초보적인 법 상식만 가졌어도 분별이 가능하다.
국정원은 지난 3월 남재준 원장 취임 이후 부서 통·폐합과 조직 개편, 인사 제도 및 업무 규정 정비, 인적 쇄신 등 강력한 자체 개혁을 해 왔다고 했다. 국정원은 과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같은 소리를 내며 이것이 국정원 개혁의 본질인 양 선전했다. 그러나 역대 정권에서 이 작업은 자기 정권 코드에 맞는 국정원을 만드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국정원의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은 대통령의 선거 참모 출신이나 정권 실세가 국정원 원장으로 내려오는 순간 국정원 개혁의 희망은 사그라졌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스스로 하겠다는 개혁 구상은 정치로부터 독립된 정보기관다운 정보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국민 요구의 최소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내 정치 논란에 당사자(當事者)인 양 끼어든 국정원이 스스로 국정원 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국정원 개혁의 최우선 목표는 정치 변화에 휘말리지 않고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존재 이유인 대북 정보 수집과 방첩, 테러 방지 활동에 몰두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국정원의 대북·대테러 업무와 국내 파트를 아예 분리하는 방안을 검토할 때가 됐다. 국정원 개혁은 이제 근원적 처방을 요구하고 있다.